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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그린 나이트》를 보고...

질문 한다 "우리는 언제 준비가 되는가?"

by 김형범

준비되지 않았다는 말은 종종 변명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삶을 살다 보면 누구나 그런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결혼을 앞두고, 부모가 되어볼 때, 새로운 직장에 첫발을 내디딜 때, 또는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섰을 때, 우리는 늘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과연 준비가 되었을까?’ 이 질문은 《그린 나이트》의 첫 장면에서 주인공 가웨인이 했던 말이기도 합니다.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어요.” 짧고 조용한 이 한마디는 영화 전체를 끌고 가는 커다란 질문이 됩니다.


《그린 나이트》는 아서왕 전설 중 하나인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영화입니다. 원작은 명예롭고 용감한 기사가 신비한 녹색 기사와 벌이는 모험담이지만, 영화 속 가웨인은 전통적인 영웅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는 방탕한 삶을 살고, 책임을 회피하며, 무엇보다 두려움을 쉽게 떨치지 못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그는 큰 실수를 하게 됩니다. 장난처럼 등장한 녹색 기사의 머리를 베어버린 것이죠. 하지만 게임은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1년 후, 그 자신도 같은 방식으로 머리를 내어놓아야 한다는 규칙이 따라붙습니다.


가웨인은 그 뒤 1년 동안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잊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 수록 그 기억은 자신을 괴롭힙니다. 결국 다음 크리스마스가 가까이 오자 아서왕은 그에게 길을 떠나라고 명령합니다. 그는 가고 싶지 않은 길을 혼자 떠나게 됩니다. 그 여정은 중세 설화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싸움이나 신의 도움으로 가득한 모험이 아닙니다. 오히려 끊임없는 회의, 유혹, 실패, 두려움 속에서 주인공이 자신을 마주보는 시간입니다. 무엇이 옳은 길인지 확신이 없는 채 헤매는 모습은 우리 모두의 삶과도 닮아 있습니다. 영화는 직접적인 설명 없이 상징과 은유를 통해 이 여정을 보여주기 때문에, 보는 내내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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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영화에서 중요한 상징 중 하나는 ‘녹색 허리띠’입니다. 이는 원전에서는 성주의 아내가 가웨인에게 건네주는 아이템이지만, 영화에서는 어머니가 아들에게 건네주는 물건으로 등장합니다. 죽음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의 물건이라지만, 영화 속에서는 이 허리띠가 진짜 힘이 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중요한 건, 가웨인이 결국 마지막 순간에 이 허리띠를 스스로 벗는다는 점입니다. 어머니의 보호, 생존 본능, 두려움을 버리는 선택. 이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진짜 용기의 순간을 상징합니다.


결말은 열린 채로 끝이 납니다. 녹색 기사는 가웨인을 칭찬하듯 웃고, “off with your head”라는 말을 남깁니다. 이는 직역하면 ‘네 목을 치겠다’이기도 하고, ‘이제 그만 머리에서 떠나라’, ‘끝이다’로도 해석할 수 있는 중의적인 말입니다. 가웨인이 정말로 죽었는지, 살아남았는지는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는 더 이상 준비되지 않았다고 말하던 사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린 나이트》는 중세의 낭만적인 판타지로 포장된 이야기를 현대적인 불안과 두려움, 인간의 내면적 성장이라는 주제로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영웅담은 이 영화에서 해체되고, 새로운 방식의 용기와 성숙함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감독은 화려한 전투나 마법이 아닌, 인간이 두려움을 마주하는 법을 그리며 그린 나이트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과연 준비가 되었는가?


삶은 준비가 완벽하게 되었을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언제나 준비가 덜 된 채로 무언가를 시작하고, 그 안에서 조금씩 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입니다. 《그린 나이트》는 그런 인간의 본질을 꿰뚫고 있습니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여정, 그것은 어쩌면 자기 삶을 자기 의지로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성장’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는 그 과정을 가장 서정적이고 기묘한 방식으로 보여주며, 스스로에게 묻게 합니다.


나는 지금, 준비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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