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줄이고 의미를 더하다

피카소의 11마리 황소

by 김형범

피카소의 라인화는 단지 감성적인 표현 방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치열한 사유의 결과이자, 본질을 향해 도달한 선의 철학입니다. 특히 1945년에 그린 ‘황소(The Bull)’ 연작은, 구상에서 추상으로 나아가는 피카소의 예술적 여정이 고스란히 담긴 시리즈로 평가받습니다. 이 연작은 한 마리 황소를 점점 단순화시켜 나가는 과정을 11단계에 걸쳐 보여주는데, 처음에는 해부학적으로 사실적인 모습에서 시작해 마지막에는 선 몇 개로 이루어진 추상적 형상으로 귀결됩니다.


그는 단순화하는 과정에서 형태를 점차 걷어냅니다. 근육과 피부, 그림자와 무게감이 사라지고, 결국 남는 것은 가장 상징적인 뿔과 몸통, 네 다리를 나타내는 몇 개의 선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마지막 그림을 보면서도 우리는 그것이 황소임을 즉각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는 피카소가 단순히 대상을 줄여 그린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의 ‘정수’를 끌어낸 것임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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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는 “나는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는다. 나는 생각나는 대로 그린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는 우리가 사물의 외형을 통해 인식하는 것보다,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고 어떻게 느껴지는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황소는 단지 동물이 아니라, 힘, 야성, 생명력, 심지어 스페인의 정체성과 연결된 상징이었습니다. 피카소는 그것을 단순화함으로써 오히려 더 넓은 층위의 의미를 불러냈습니다.


‘황소 연작’은 미술 교육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예시입니다. 대상의 외형을 반복적으로 그리며 관찰하다 보면, 결국 본질적인 특성과 불필요한 요소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피카소는 그 과정을 예술가의 손으로 증명해 보였습니다. 이 작업은 동시에, "예술은 어디까지 단순화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라인화는 흔히 '쉽다', '간단하다'고 여겨지지만, 피카소의 작업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치열한 축약의 결과인지를 실감하게 됩니다. 그는 ‘그리는 것’을 넘어, ‘덜어내는 것’의 미학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덜어낸 자리에는 감상자가 스스로의 감각과 해석을 채워넣을 여지가 생겼습니다.


선 하나로도 황소를 인식하게 만든 이 작업은, 결국 ‘무엇이 본질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으로 돌아옵니다. 황소의 근육과 질감이 사라져도 그것이 황소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술은 형상을 얼마나 유지해야 하고, 또 얼마나 비워야 할까요? 피카소는 그 해답을 주지는 않았지만, 그 질문을 선명한 선들로 우리 앞에 남겨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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