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욕, 쾌락, 이성의 철학이 가리키는 삶의 균형
인간은 욕망과 함께 살아간다. 욕망은 삶을 움직이는 가장 본질적인 힘이자, 때때로 삶을 무너뜨리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어떤 철학은 욕망을 억제하라고 말하고, 또 어떤 철학은 그것을 받아들이되 경계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철학은 욕망을 긍정하며 그 힘을 삶의 중심으로 삼는다. 다양한 목소리 속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욕망은 정말 억제해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면 잘 길들여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성직자의 금욕주의적 이상은 욕망을 끊어냄으로써 자신을 세속적 질서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시도였다. 그들은 절제를 통해 도덕적 권위를 얻고자 했고, 고통을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니체는 그 금욕주의를 ‘삶에 대한 복수’라고 해석했다. 욕망을 억누른 결과 생겨난 원한이 금욕이라는 형태로 표출된 것이라는 것이다. 니체는 고통을 숭배하는 문화 대신 삶을 긍정하는 태도를 강조했다. 그가 말한 삶의 긍정은 욕망과 본능, 창조성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였고, 삶의 에너지를 억누르지 않고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반면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삶의 중심에 두었지만, 그 쾌락은 자극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불필요한 욕망에서 벗어난 고요한 상태였다. 그는 쾌락을 절제와 자족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욕망 그 자체가 아니라,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을 끊임없이 좇는 습관이었다. 그래서 그는 빵과 물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으며, 진정한 부유함은 더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데서 온다고 말했다. 그의 철학은 쾌락을 통해 욕망을 조절하는 방식이었고, 결국 쾌락과 절제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는 삶이었다.
스토아 철학은 또 다른 방식으로 욕망을 다루었다. 그들은 세상을 바꾸는 대신, 세상에 대한 반응을 바꾸고자 했다. 감정과 욕망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에 휘둘리지 않도록 이성의 중심을 세우려 했다. 인간은 감정의 흐름 속에 있지만, 그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고 자신의 판단과 태도를 지켜낼 수 있다는 믿음. 그것이 스토아 철학이 강조한 덕목이었다. 삶의 외부 조건은 통제할 수 없지만, 그 조건에 대한 내면의 반응은 충분히 다룰 수 있다는 전제는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철학적 자산이다.
이처럼 각 철학은 욕망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금욕은 억제, 에피쿠로스는 절제, 니체는 긍정, 스토아는 조절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하나의 질문에 답하려 한다. 인간은 욕망에 끌려다니는 존재인가, 아니면 욕망을 다룰 수 있는 존재인가. 중요한 것은 어떤 철학을 선택하느냐보다, 그 철학이 삶의 한 조각을 어떤 방식으로 비추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일이다. 우리가 욕망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삶의 태도는 달라진다. 때로는 멈추어야 하고, 때로는 받아들여야 하며, 때로는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결국 욕망은 억제할 대상이라기보다는, 이해하고 다룰 수 있어야 할 감정이다. 그것은 삶을 움직이는 에너지이며,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방향이기도 하다. 억제도 방임도 아닌, 그 사이의 미묘한 긴장 속에서 우리는 균형을 찾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욕망의 유무가 아니라, 그것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이다. 그 관계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이해하고, 삶의 중심을 세울 수 있다. 철학은 그 중심을 찾아가는 과정을 안내할 뿐이며, 결국 삶의 방향은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