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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의 껍데기를 벗어난 영화, 그 내용은 어디로 가는가

박찬욱 감독의 아이폰 발언이 보여준 영화인의 믿음과 현실의 간극에 대하여

by 김형범

영화감독 박찬욱이 아이폰으로 영화를 찍어도 된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흔히 '역시 박찬욱!' 하며 그의 파격적인 시도에 감탄했습니다. 그가 2025년 베니스 영화제 기자회견에서 이와 같은 발언을 했을 때, 이는 마치 영화의 본질은 값비싼 장비가 아닌 창작자의 시선에 있다는 깊은 믿음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발언이 던진 메시지는 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함께, 오늘날 영화가 직면한 냉혹한 현실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영화를 둘러싼 미디어 환경은 지금, 스크린과 관객의 관계를 근본부터 뒤흔들고 있습니다.


예술가들은 오랜 시간 동안 형식과 내용의 관계를 탐구해 왔습니다. 철학자 헤겔은 이 둘을 분리할 수 없는 '하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릇(형식)이 바뀌면 그 안에 담기는 내용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거대한 극장의 스크린에 웅장한 사운드와 압도적인 영상으로 관객을 압도하던 영화는, 영화관이라는 특별한 형식 안에서 예술이라는 지위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수많은 낯선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영화가 선사하는 '공동의 경험'을 통해 그 예술적 가치를 공유했습니다. 감독이 아무리 작은 카메라로 영화를 찍었다고 해도, 관객에게는 여전히 극장의 거대한 스크린이라는 공통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넷플릭스, 디즈니플러스 같은 OTT 플랫폼이 익숙해졌습니다. 이제 영화는 더 이상 극장의 검은 공간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굳이 외출하지 않아도,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로 원하는 시간에 언제든 영화를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관객과의 접점이 극장에서 OTT로 옮겨가는 변화는 단순히 영화를 보는 '창구'가 바뀐 것을 넘어섰습니다. 영화라는 형식이 '공동의 체험'에서 '개인의 체험'으로 완전히 뒤바뀌는 과정인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영화는 더 이상 2시간짜리 완결된 한 편의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고, 수십 편의 에피소드로 나뉜 복잡한 서사를 펼쳐 보이거나 짧고 자극적인 영상으로 변모하기도 합니다.


박찬욱 감독의 '아이폰으로 찍으면 된다'는 발언은 제작 기술의 진입 장벽이 사라져야 한다는 그의 신념을 보여주지만, 한편으로는 영화가 직면한 더 큰 현실적 고민을 외면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영화관이라는 형식이 흔들릴 때 영화의 위상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새로운 제작 도구가 있다'는 대답은 다소 아쉬움을 남깁니다. 그의 발언은 제작의 민주화에는 답이 될지언정, 영화가 예술로 인정받게 한 '관객과의 접점'이라는 형식의 변화에 대한 답은 될 수 없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는 2025년 베니스 영화제에 자신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를 선보였지만, 이 작품 역시 수백억 원이 투입되는 상업 시스템 속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아이폰으로 찍어도 된다는 그의 신념과 수백억 원이 투입되는 상업 영화를 만드는 현실 사이의 간극은, 영화라는 예술이 처한 복잡한 딜레마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현재 한국의 '영화 및 비디오물 진흥에 관한 법률'은 OTT 콘텐츠를 '영화'에 포함하는 방향으로 개정되고 있습니다. 이는 법적으로도 기존의 '영화'와 '영상'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화는 더 이상 스크린이라는 특정 형식이 규정하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진화하는 '영상 콘텐츠'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편입되고 있습니다. 영화의 미래는 박찬욱 감독의 발언처럼 단순히 ‘카메라’라는 제작 도구의 변화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그의 믿음처럼 영화의 본질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우리는 영화가 관객과 만나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영화의 서사와 본질이 어떻게 재구성되고 있는지에 대한 냉철한 질문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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