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징하게'는 정말 최고의 수식어일까?
영화 '기생충'에 대한 이동진 평론가의 20자 평은 많은 이들의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낸 신랄하면서도 처연한 계급 우화". 이 짧은 문장 중에서도 특히 "명징하게 직조해낸"이라는 표현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죠. '명징하게'는 '빈틈없이' 혹은 '명쾌하게' 정도로, '직조해낸'은 '짜내어 만들었다'는 뜻으로 풀어볼 수 있습니다. 쉬운 말로 풀면 "매우 명쾌하고 탄탄하게 구성된" 정도가 되겠죠. 그렇다면 왜 그는 굳이 일상적으로 쓰지 않는 한자어 조합을 사용했을까요? 이는 평론가의 언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평론은 어렵게 써야만 할까요? 그리고 그 어려움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현학적인 표현이 비평의 깊이와 권위를 더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잡하고 난해한 언어로 작품을 분석하는 것이 마치 전문가의 영역임을 증명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는 때때로 내용의 본질보다 형식에 더 집착하는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진짜 지식인들은 '무엇을 말하느냐'가 중요하지, '어떻게 말하느냐'의 수사적 기교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이동진 평론가 스스로가 '말의 맛'을 위해 이런 표현을 쓴다고 말한 것처럼, 이는 결국 내용의 깊이보다 말의 포장에 더 신경을 쓴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이는 본질보다 겉치레를 중시하는 태도로 비춰지기 쉽습니다.
더욱이, 불필요하게 어려운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독자나 청중과의 거리를 만듭니다. '명징하게' 같은 단어를 쓸 이유가 없는데도 굳이 사용하는 것은, '나는 너희와 다른 수준의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라는 암묵적인 우월감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이는 불필요한 권위 만들기로 이어집니다. 사실 진정한 실력을 갖춘 지식인일수록 어려운 개념을 쉽고 명확하게 설명하려 노력합니다. 어려운 말로 무장하는 것은 종종 깊은 이해가 부족한 것을 가리기 위한 지적 허영의 냄새를 풍기기도 하죠.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할 수 있다'고 한 것처럼, 진짜로 깊이 이해한 사람은 쉽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평론가의 글쓰기 스타일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그의 현학적인 표현을 좋아하는 독자들도 분명 존재합니다. 하지만 평론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소통입니다. 작품을 독자와 함께 이해하고, 그 안의 가치를 나누는 것이죠. 그런데 굳이 어려운 말을 사용하면 소통이 아닌 '나 좀 봐라' 하는 과시가 되어버립니다. 이는 비평가로서의 지적 성실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학문과 비평의 흐름은 '민주화'와 '접근성'을 향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개념도 대중과 나누려는 노력이 중요한 시대에, 90년대식의 권위적인 지식인 코스프레는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동진 평론가의 20자 평은 그의 탁월한 통찰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평론가의 언어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현란한 표현이 주는 '말의 맛'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평론의 본질일까요? 아니면 대중과의 진정한 소통을 위한 지적 성실성이 더 중요한 가치일까요? 결국 평론이 추구해야 할 것은 과시가 아닌 소통이며, 현란한 표현보다 진정성 있는 통찰을 담아내는 데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