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시장의 장르 세탁과 사라진 이름표에 대하여
평소 좋아하던 뮤지컬 배우의 공연 소식을 듣고 설레는 마음으로 극장을 찾았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화려한 무대 장치와 압도적인 퍼포먼스에 넋을 잃고 공연을 감상했지만, 막상 극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던 배우의 시원한 고음이나 감미로운 노래는 단 한 소절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당혹감을 느끼며 공연장을 나선 당신은 문득 의문에 빠집니다. 내가 본 것은 분명 뮤지컬이라고 적힌 티켓이었는데, 왜 무대 위에는 노래가 없었을까요. 안타깝게도 이런 기묘한 경험은 최근 우리나라 공연 시장에서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는 실제 상황입니다.
이 기묘한 현상의 중심에는 장르 세탁이라는 다소 씁쓸한 전략이 숨어 있습니다. 원래 뮤지컬이라는 장르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음악이 서사를 이끌어가는 핵심 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인물의 감정이 고조될 때 대사가 노래로 변하고, 그 노래가 곧 극의 흐름이 되는 것이 뮤지컬의 본질입니다. 하지만 최근 큰 인기를 끌었던 라이프 오브 파이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같은 작품들은 해외에서 권위 있는 연극상을 휩쓴 명백한 연극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들어오는 순간 뮤지컬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관객을 만납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처럼, 연극이 연극이라는 제 이름을 찾지 못하고 엉뚱한 옷을 입고 있는 셈입니다.
공연 기획사들이 이런 무리한 선택을 하는 배경에는 한국 공연 시장만이 가진 독특하고 왜곡된 구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리 공연계에서 뮤지컬은 화려한 볼거리와 함께 높은 티켓 가격을 지불할 가치가 있는 프리미엄 콘텐츠로 인식되는 반면, 연극은 상대적으로 소박하고 영세하며 저렴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강합니다. 실제로 뮤지컬 시장은 전체 공연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비대해졌지만, 연극은 그 위상에 한참 미치지 못합니다. 이렇다 보니 제작비가 많이 투입된 대형 연극을 들여올 때, 관객들이 가질 티켓 가격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인지도에 기대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장르의 모호함이 결국 관객과 시장 모두에게 상처를 남긴다는 점입니다. 가창력이 뛰어난 배우의 노래를 기대하고 비싼 값을 치른 관객은 기만당했다는 기분을 떨치기 어렵고, 이는 공연 문화 전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는 공연 통계 데이터조차 왜곡시켜 실제 시장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더 나아가 비싸고 화려하면 무조건 뮤지컬이어야 한다는 논리는 연극이 가진 고유한 예술적 가치와 상업적 잠재력을 스스로 깎아먹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연극 또한 그 자체로 충분히 웅장하고 압도적일 수 있으며, 그에 걸맞은 가치를 인정받아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직한 이름표를 붙여주는 용기입니다. 노래가 없어도 충분히 감동적인 연극을 연극이라고 당당하게 부를 수 있을 때, 관객들은 장르에 대한 편견 없이 작품 그 자체의 매력을 온전히 즐길 수 있습니다. 장르를 세탁하여 눈앞의 이익을 쫓기보다는, 연극이라는 장르가 가진 품격과 스펙터클을 관객들에게 제대로 설득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투명한 시장 안에서 연극과 뮤지컬이 각자의 본질로 승부할 때, 비로소 한국의 공연 문화는 한 단계 더 성숙한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