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부품에서 지휘자로, 무너지는 일의 경계

인공지능이 대체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분업이라는 구조입니다

by 김형범

아침에 출근하여 모니터를 켜고 업무용 우편함을 열어보는 평범한 사무실의 풍경을 상상해 봅니다. 기획을 담당하는 사람은 디자인 작업물을 기다리고, 디자인을 맡은 사람은 프로그램 개발이 끝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각자의 책상에 앉아 하나의 거대한 퍼즐 조각을 맞추듯 일해왔습니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한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처럼, 일을 아주 잘게 쪼개어 각자 맡은 부분에만 집중하는 방식은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절대적인 진리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최근 우리의 일터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고 있습니다. 흔히 기업의 인공지능 전환이라고 부르는 이 거대한 변화는 단순히 기존의 업무에 편리한 도구 하나를 더 쥐여주는 수준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새로운 기술이 개인의 일자리를 빼앗을지 모른다고 걱정하지만, 기술이 진짜로 대체하고 있는 것은 개인이라는 낱개의 단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조직이 오랜 시간 공들여 구축해 온 촘촘하고 견고한 분업 구조 그 자체를 통째로 허물고 있습니다.


기획의 언어와 시각적인 디자인의 언어, 그리고 대중에게 알리는 마케팅의 언어는 원래 서로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 사이를 통역하고 조율하기 위해 수많은 회의와 서류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단 몇 번의 대화와 명령어만으로 기획서가 시각적인 결과물로 바뀌고, 그것이 다시 대중을 설득하는 문구로 순식간에 이어집니다. 직무와 직무 사이의 단절을 기술이 매끄럽게 이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느 한 영역만 담당하던 사람이 다른 영역의 업무까지 꿰뚫어 보고 실행할 수 있는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한 사람이 기획하고, 만들고, 알리고, 운영하는 모든 과정을 끊김 없이 이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조직의 칸막이가 허물어지는 이 놀라운 현상은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깊은 내면의 혼란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나의 직업과 나의 직무를 곧 나의 정체성으로 여기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기획을 하는 사람, 혹은 결과물을 제작하는 사람이라는 단단한 자아상 위에서 평생의 경력을 쌓아왔는데, 갑자기 그 경계가 지워지고 모든 것을 아울러야 한다는 낯선 요구를 받게 됩니다.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눈부신 성장의 기회가 아니라, 자신이 평생 쌓아온 고유한 색깔이 흐려지고 전문성이 무너지는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인공지능의 도입이 단순한 업무 효율의 문제를 넘어, 내가 누구인가를 묻는 근본적인 정체성의 문제로 번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가오는 미래의 일터에서 마주할 가장 큰 숙제는 새로운 기술을 얼마나 능숙하게 다루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나를 좁게 규정하던 직무의 껍질을 깨고 나와, 하나의 문제를 온전히 해결해 내는 주체로 다시 설 수 있느냐는 태도의 문제입니다. 이제 우리는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이 아니라, 인공지능이라는 훌륭한 조수들을 이끌며 하나의 완성된 교향곡을 만들어내는 지휘자가 되어야 합니다. 컨베이어 벨트가 멈춘 자리에 새롭게 세워질 무대 위에서, 우리는 어떤 문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고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인지 스스로에게 증명해 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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