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의 잣대를 버리고 우리만의 세대 읽기-86세대

X와 Z 이전, 광장의 세대가 있었다

by 김형범

우리가 흔히 입에 오르내리는 X, M, Z 세대라는 서구의 알파벳 꼬리표는 한국인들의 복잡한 속내를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합니다. 바다 건너의 인구학적 변화가 아니라, 한반도 특유의 치열한 정치적, 경제적 압박이야말로 우리의 내면 풍경을 빚어낸 진짜 거푸집이기 때문입니다. 거시적인 사회의 압박이 해소되거나 혹은 더 무겁게 짓누를 때, 그 반작용으로 세대의 진화가 일어났습니다. 정치적 억압이 풀린 자리에는 문화적 자유주의가 피어났고, 경제적 압박이 덮친 자리에는 처절한 각자도생과 공정을 향한 갈망이 자라났습니다. 이 거대한 한국 사회의 변화를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 우리는 그 모든 궤적의 출발점인 80년대 후반의 뜨거웠던 광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1987년의 늦봄과 여름은 단순한 과거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현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새로운 운영체제가 본궤도에 오른 결정적 분기점이었습니다. 이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힌 86세대 주역들은 대학 캠퍼스와 매캐한 최루탄 연기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벼려냈습니다. 거리에 모여 스크럼을 짜고 군부 독재라는 굳건한 벽에 맞서 싸웠던 강렬한 공동의 기억은 이들에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끈끈한 연대 의식을 심어주었습니다. 동지를 위해 기꺼이 희생을 감내하고 거리를 내달렸던 뜨거운 용광로 속에서 파편화된 개인의 자리는 옅어졌고, 오직 거대한 우리라는 집단의 대의만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남게 되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거악과 싸워야 했던 시대적 환경은 이들의 내면에 뚜렷한 선악의 이분법을 아로새겼습니다. 타협할 수 없는 절대 악이 존재했기에,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 역시 이익의 유무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무엇이 옳은가에 맞춰졌습니다. 이러한 배경은 훗날 이 세대 특유의 당위성과 엄숙주의로 굳어지게 됩니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이중의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피와 땀으로 민주화라는 찬란한 정치적 승리를 쟁취해 낸 직후, 이들은 매년 두 자릿수의 놀라운 경제 성장을 거듭하던 고도성장기에 맞물려 사회로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풍부한 일자리와 고속 성장의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탄 거리의 청년들은 거침없이 사회 전 분야로 뻗어나갔습니다. 탄탄한 경제적 안정을 지렛대 삼아 정치, 경제, 문화의 핵심 요직을 빠르게 차지하며 한국 사회의 가장 강력한 주류로 우뚝 섰습니다. 이들이 주도권을 쥔 사회의 분위기 역시 그들이 살아온 궤적을 고스란히 닮아 있었습니다. 국가의 발전, 민족의 미래, 민주주의의 완성 같은 거시적이고 무거운 담론들이 항상 세상의 중심을 차지했습니다. 그 거대한 서사의 그늘 아래서 개인이 가진 미시적인 취향이나 소소한 일상의 욕망들은 으레 배부른 소리나 시대정신에 어긋나는 사소한 투정으로 치부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눈부신 빛은 필연적으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기 마련입니다. 세상을 바꾸었다는 자부심과 도덕적 우월감은 시간이 흘러 사회의 기득권이 되는 과정에서 다음 세대에게 숨 막히는 권위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정답을 쥐고 있다는 굳건한 확신은 어느새 타협을 모르는 낡은 권위주의로 변모하며 세대 간의 깊은 균열을 만들어냈습니다. 무엇보다 한국 경제의 폭발적인 성장기가 끝난 후에도 이 거대한 집단은 특유의 결속력으로 사회의 핵심 자원을 오랫동안 틀어쥐었고, 이는 의도치 않게 후속 세대가 딛고 올라가야 할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거두어들이는 구조적인 병목 현상을 낳았습니다.


광장의 연대로 쟁취한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성취는 한국 사회를 비약적으로 도약시킨 위대한 유산입니다. 그러나 그 유산이 남긴 무거운 거대 서사와 단단한 기득권의 벽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억압이 되었습니다. 숨 막히는 집단의 대의와 이념의 무게에 지친 한국 사회는 바로 그 반작용을 통해 완전히 다른 가치를 갈망하게 됩니다. 광장의 정치가 안정화된 그 빈자리에서 비로소 이념을 벗어던지고 개인의 자유를 노래할 다음 세대의 등장은 이미 예정된 역사의 필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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