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계라고 믿었는데 뒤늦게 알게된 결백함에 대하여
독립영화의 현장은 대개 서늘하다. 예산은 늘 발목을 잡고, 의상팀이라는 존재는 사치에 가깝다. 배우가 자기 옷을 직접 챙겨오는 것이 관례처럼 통용되던 시절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주인공 캐릭터상 구두가 꼭 필요했는데, 배우는 멋쩍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저... 구두가 없는데요.”
귀를 의심했다. 서른다섯. 적지 않은 나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성인 남자가 집에 구두 한 켤레가 없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순간적으로 마음속에 날 선 가시가 돋았다. ‘나를 골탕 먹이려는 걸까?’, ‘출연료가 적다고 시위하는 건가?’
적은 출연료를 받고 고생하는 배우에게 대놓고 화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속으로 그의 ‘본심’을 수십 번 의심하며, 결국 어찌저찌 구두를 구해 영화를 찍었다. 그 구두가 그의 발에 맞았는지, 그날 그의 걸음걸이가 어떠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오직 내 머릿속엔 ‘서른다섯에 구두가 없는 남자’라는 편견 섞인 낙인만이 남았을 뿐이다.
시간이 흘렀다. 당시의 그 무명 배우는 이제 길을 걷다 보면 누구나 알아볼 만큼 유명한 배우가 되었다. 물론, 대중적인 인지도와는 별개로 내 기억 속 그는 여전히 이름보다 ‘그날의 구두 사건’으로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었다.
오늘 우연히 SNS 스레드에서 그의 최근 사진을 보았다. 시사회 현장에 찍힌 사진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의 발끝을 유심히 살폈다. 사진 속 그는 구두가 아닌 신발을 신고 있었다. 아주 자연스럽고 익숙한 모습으로.
그 순간,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아, 진짜였구나.’
그는 나를 기만하려 했던 것도, 현장을 태만하게 대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구두가 필요 없는 삶을 살고 있었을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상식인 ‘구두 한 켤레’가, 누군가에게는 삶의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난 낯선 물건일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몰랐다.
스레드에 이 이야기를 짧게 올렸더니 반응이 엇갈렸다. 구두 없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며 공감하는 이들도 있었고, 영화를 찍으면서 기본 준비도 안 했냐며 나를 탓하는 이들도 있었다. 글이 짧아서인지 내가 모자라서인지 배우를 비난하는 것으로 느끼고 그런 것이다. 조금 많이 부끄러웠다.
지금의 나는 안다. 그때 내가 화가 났던 건 배우의 불성실함 때문이 아니라, 내 기준이라는 좁은 틀에 타인을 가두고 심판하려 했던 내 오만함 때문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확인한 그의 신발 너머로, 오래전 내가 놓쳤던 그의 진심을 알게 되었다.
오해는 참으로 견고하고, 진실은 때로 이토록 느리게 도착한다.
늦었지만 그에게 마음속으로 조용한 사과를 건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