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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ka GG Dec 28. 2020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도 답이라고 배웠습니다만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왔을 뿐이고

| 굿바이 제주, 헬로 서울 

2년 간의 제주생활을 마무리하는 데는 고작 2주 정도가 걸렸다. 2년 동안 나의 살림살이는 크게 늘어나지도 줄지도 않았다. 바리바리 담아 둔 짐들 중 몇 개는 주변에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었고, 더러 몇 상자는 택배로 부치고 나머지 짐은 나타샤-타고 다니는 내차-에 모두 실었(렸)다.

 

서울로 다시 터전을 옮기는 일은 생각보다 너무 쉬웠다. 돌아갈 결심을 하기까지 아주 많은 고민이 있었던 것에 비하면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간단했다. 결국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빌딩 숲 속 사무실 작은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다, 종종 회의를 하고, 또 가끔은 전화기를 붙잡고 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삶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이런 삶이 못 견디게 싫은 건 아니다. 대한민국 사무직의 보편적인 일상이니 말이다. 직장에서의 월급은 고정급으로 생각한 지 꽤 되었다. 고정급 자체가 크다면 (나 아닌 누구라도 마찬가지 일테지만) 여러가지 못마땅한 환경 속에서라도 최대한 버틸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 보니 회사에서 더 많은 에너지를 쏟으며 얼마 안 되는 수당이나 성과급 혹은 돈으로 주지 않고 쉬라고 주는 하루 이틀의 대체휴일을 쌓아두느니 업무시간에 최대한 집중해서 정시에 퇴근하자는 주의다. 물론, 물리적으로 많은 양의 업무가 닥쳐올 때는 별수 없는 노릇이지만.




| 사주팔자 대신 안 쓰는 물건이나 팔자

제주에서의 마지막은 '인생은 실전'이라며 또 한 번 나를 시험에 들게 한 순간이었다. 대게는 돈과 관련한 문제였고, 한 사람에 대한 복잡한 미움과 여러 감정이 휘몰아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평이한 인생 필모그래피를 그리는 건 아직까진 무리인가라는 생각에 평소에 전혀 관심이 없던 사주나 신점을 한 번 봐야 할까 싶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며칠 전 지인을 통해 처음 알게 된 사람이 사주를 보러 간다며 연말연시면 의식처럼 치르는 일인데 나는 어떠냐고 물었다.


A: "사주나 점 보러 안 다니세요?"

나: "아 저는 지금까지 사주나 점은 본 적이 없어요. 그냥 딱히 재미로도 안 봐요"

A: "정말요? 아직 인생의 굴곡이 없으신가보다..바닥을 한 번 쳐보면 연말연시에 가장 먼저 찾게 될 거예요"

나: "굴곡은...아주 많은데요, 안 좋은 소리 들으면 꽤나 신경 쓰게 될 것 같아서 안 봐요~"

A: "그래도 아직 삶이 살만 하신가 보다~"


사주를 안 본다는 이유로 세상 걱정 없이 사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고 인생이 밑바닥까지 치닫은 건  아니었지만, 나름 또래에 비해 조금은 더 다양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한다. 내 서사를 읊어 나가기엔 너무 초면이라 "에이~ 고민이 없진 않죠"로 마무리하고 대화 주제를 넘겼다.

사주팔자에 돈 쓰는 대신 안 쓰는 물건이나 중고거래로 팔고 용돈이나 챙겨봐야겠다. 




|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도 답일지 몰라

서울로 이사한 지 오늘이 딱 일주일째 되는 날이다. 조금은 더 제주에 머물고 싶기도 했다. 좋기도 싫기도 한 그 섬에 뭐 그리 미련이 많이 남아있는지. 결국 그리운 건 좋은 기억을 함께한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이 여전히 제주에 남아 있어서 인 것 같다. 어쨌거나 나는 다시 서울이다. 사실 더 익숙한 곳은 제주가 아닌 여기이다. 내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은 이곳이니까.

 

서울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곳에서의 출근 첫날, 제주에서 왔다는 나에게 사람들은 꽤나 관심을 보였다.


T1: "제주도에서 오셨다고 들었어요~ 원래 제주도 분이세요?"

나: "아니요~ 제주에 일 때문에 가서 2년 정도 살다가 왔어요."

T2: "저 제주도 좋아해서 제주도 여행 진짜 많이 가거든요~ 너무 좋으셨겠다!"
나: "사실 일하면서 지내는 건 서울이나 제주나 별반 차이는 없어요~ 그래도 바다, 산이 가까이에 있다는 건 정말 좋은 거 같고요"

T2: "저는 진짜 당장이라도 제주도 가서 살고 싶거든요!"

나: "그냥 가서 사시기에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은 아닐 거예요~ 날씨도 생각보다 별로일 때가 많고, 누가 옆에 있어 외롭고 그럴 때가 많거든요"

T1: "아 그래요? 제주에 사는 건 그저 사람들의 로망일까요..?"

나: "음..저는 '네'라고 말씀드릴 거 같아요"


제주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제주는 정말 그런 곳이었기 때문에 묻는 말에 그저 솔직하게 나의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그래도 2년 동안의 제주살이는 나를 바꿔놓긴 했나 보다. 사실 저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집 창밖으로 내다 보이던 바다를, 오름 아래로 펼쳐지던 제주 풍경을 그리워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직장생활이 무조건 즐거웠으면 했던 때가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는 좋아야 한다는 강박 아닌 강박에 시달리던 때도, 맡은 일에서 무조건 최대치 이상을 뽑아내야겠다는 욕심을 가졌던 순간도 많았다.

러다 이제는 의지만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저 큰 문제없이 지나가는 하루가 되길 바라고, 내가 할 수 있는 능력 최대치의 120%가 아닌 100%까지만 하기로 다시 마음먹었다. 120이란 숫자가 100으로 줄었지만, 이것도 결국 최대치까지는 해보겠다는 거다. 그 이상을 갈아 넣지 않겠다는 것일 뿐. 물론 지금도 하루의 반 이상을 보내는 직장생활 무미건조하기 보다는 이왕이면 즐거웠으면 한다. 그러나 그래야만 한다는 강박은 없다.  


얼마 전 티비를 보다 '유퀴즈 온더 블록'에 또래로 보이는 여자 변호사 분이 나온 걸 보았다. 그 사람이 살아온 생활태도에 나를 대비해 보니, 아주 평이한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에 불과해 보였다. 그 사람의 노력도, 노력으로 얻은 결과도 모두 훌륭했지만 누구나 각자의 삶이 있기에 지금까지 그려온 나의 삶의 궤적도 꽤나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있던 곳으로 다시 돌아왔을 뿐이다. 앞으로를 살아가야 하니 지나온 일에 연연하기보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촉각을 세워 보기로 한다.


그리고 그리울 땐 가끔 제주 바다를 떠올려 보기로 했다. 당분간은 그거면 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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