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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의 네덜란드 거리는 쉴 새 없이 터지는 폭죽과 함성 소리로 어수선했다. 네덜란드에선 이미 몇 년 전 불꽃놀이가 불법으로 바뀌었지만 전통을 위해 독일이나 다른 인접한 나라들에서 비싸게 구해와 터뜨리는 것이라고, 당시 만나던 더치 남자는 내게 말해주었다. '이건 더이상 불꽃놀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 같은데.'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폭죽 소리와 불길을 피해 핸들을 돌리며 나는 생각했다. 화염에 휩싸인 종이뭉치와 나무판자들이 게임 속 장애물처럼 도로 한가운데서 아무렇지 않게 타고 있었다. 나는 소개팅 앱에서 찾은 또 다른 더치 남자를 바에서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서로에게 무관심한 일회성 만남. 흥미롭지 않은 대화를 이어가는 중에도 나는 거짓말이 귀찮아 그에게 휴학을 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래놓고 왜? 라고 묻는 질문에는 그냥, 이라는 거짓말을 했다.
12월 중순, 나는 끝없이 밀리는 학교 진도와 반복되는 악몽에 지쳐 휴학을 신청했다. 이 주 만에 한국에서 꾸역꾸역 돌아왔건만 결국은 네가 남긴 우울에 나 역시 패배하고 만 것이다. 네덜란드로 돌아온 이후의 한달은 나름 그럭저럭 괜찮았다. 네 기억이 묻어 있을 리 없는 공간 속에서, 나는 오히려 잘 웃었고 잘 지냈다. 간간이 소식을 들은 클래스메이트들이 조의를 표할 때마다, 내가 하나도 안 슬퍼 보여서 어쩌지 걱정이 되었을 정도로. 난 내가 괜찮아서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평생 괜찮을까봐 두려웠다. 기우였다. 종일 도서관에서 시간을 죽이다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어김없이 남자들을 찾았다. '혼자는 안돼.' 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현관문을 열면 눈 앞에 누군가의 가슴이 서있었다. 하루에 한 번. 많으면 두 번. 국적도 이름도 나이도 잊혀진 남자들이 내 몸 위에서 얼굴만 바뀌었다. '저건 누구야?' 이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호주 남자는 내 방 캐비넷 위의 네 사진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며칠 전 자살한 내 여동생이라고 말했고. 남자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짓다 갑자기 할 일이 생각났다며 급히 내 집을 떠났다. 그러면 나는 다시 어플을 켜고 다음 남자를 집으로 불렀다.
집에 도착하고 나는 캐비넷 안에서 인센스 스틱을 꺼내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구제 상점에서 모은 잡다한 물건들로 가득한 캐비넷 위에는 너를 위한 제단이 마련되어 있다. 네 유골이 들어있는 직접 뜬 뜨개 파우치 앞엔, 한국에서 뽑아온 증명사진 크기의 네 영정사진과 노란 튤립이 꽂힌 작은 유리 화병,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촛불을 든 천사 모형의 램프, 앵두가 그려진 작은 샷글라스와 그 주변을 둥글게 싸고 있는 소띠용 염주 팔찌, 그리고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 만든 흰색 도자기 인센스 스틱 홀더가 어지러이 늘어져 있었다. '그리스도교와 불교, 전통과 현대가 웃기게 뒤섞인 포스트모던 제단,' 네 제단을 사진으로 본 친구는 언젠가 이렇게 평을 내렸다. 나는 냉장고에서 화이트 와인을 꺼내 와 샷글라스에 따랐다. 잔을 손으로 받친 채 인센스 스틱 위에서 한 바퀴 빙글 돌리곤 다시 원래 자리에 내려놓는다. 그리곤 소파의 방석을 끌어다 제단 앞에 놓은 뒤 그 위에서 삼세번 절을 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중얼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합장. 이 모든 건 한국에 머물던 이 주간 절에서 배워온 것들이었고. 나는 이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이것을 반복했고. 그리고 그날은 너의 사십구제 날이었다. 마침내. 불교에서 죽음 이후 칠 일마다 반복된다는 일곱 번의 재판들 중 가장 마지막 일곱 번째 재판일. 언제부턴가 불교에 빠진 엄마의 바람에 따라 너의 사십구제는 제주집 근처의 작은 절에서 성대하게 치뤄졌다.
'그래서. 너는 무슨 선고를 받았니?'
나는 무릎에 짓눌려 납작해진 다홍색 방석을 머리에 가져다 대고 그대로 소파에 기대어 누웠다. 초록색 체크무늬의 일인용 소파 위엔 어떻게 누워도 어정쩡한 자세 밖에 나오지 않는다. 나는 몸을 한껏 늘어뜨리고 카카오톡을 열어 종일 미뤄왔던 너의 사십구제 사진들을 열어본다. 한국에서 오전 시간에 치뤄진 사십구제는 8시간의 시차를 생각하면 이미 하루 전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날 늦은 새벽, 그러니까 한국에선 네 사십구제가 한창이었을 시간, 나는 어두운 방 안에서 같은 자세로 소파에 누워 줄곧 의미 없는 유튜브 영상들을 클릭했다. 핸드폰 화면에 계속해서 뜨는 가족들이 보낸 메세지 알림들을 애써 위로 밀어 올리며. 미리보기용으로 작게 뜨는 사진들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다음 영상. 다음 영상. 그렇게 멍하니 같은 행위를 반복하다 동이 틀 무렵 겨우 잠에 들었다. 창 밖에서는 여전히 폭죽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었다. '수아 옷들 다 잘 태워서 보내줬어.' 절의 소각장을 찍은 여러 장의 사진들이 있었지만 내 눈엔 남은 불씨와 재 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진을 옆으로 한 장 넘기자 의식을 치르는 스님들 뒤로 익숙한 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샛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나오는, 시멘트 벽과 기와지붕이 묘하게 섞인 법당 건물. 그 뒤의 산식각. 돌 절벽. 숲. 한달 반이 지났지만 마치 어제 본 풍경 같았다. '산신각에도 이젠 겨울이 왔겠네.' 나는 산신각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던 조화 다발을 두른 산신 동상을 생각한다.
제주에서 머문 이 주 내내, 나는 절 단상에 놓인 네 사진을 보기 위해 아침마다 엄마와 함께 절에 다녔다. 내가 원한 것도 너를 위한 것도 아닌 오직 엄마를 위해서였다. 엄마가 절을 하는 동안, 나는 법당 밖으로 조용히 나와 절 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절은 법당, 산신각, 식당, 스님이 머무는 집, 이렇게 작은 건물 네 채와 마당 하나가 전부였는데, 나는 그 중에서도 산신을 모신다는 산신각을 가장 좋아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산신각 쪽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는 언제나 배운 대로 오른 벽을 가득 채운 유리 미닫이문을 활짝 열고 나가 향과 초를 키고 산신상을 향해 세 번 절을 했다. 그리곤 구석자리에 앉아 네가 나 몰래 제주집으로 훔쳐갔던 소설책을 꺼내 읽었다. <빛과 물질에 대한 이론>. 내가 서울집에서 몇 년 간 찾아 헤맸던 그 책은 네 방에 아무렇지 않게 꽂혀 있었다. 책을 읽다 종종 유리문으로 드리운 오전 햇살이 페이지를 침범하면, 나는 잠시 읽는 것을 멈추고 산신각 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법당 처마 끝과 나무가 보이는 풍경 뒤로, 멀리 숲에서 오는 새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은 채 핸드폰 화면에서 고개를 돌려 내 방 창 밖을 바라본다. 그러나 눈 앞엔 빨간 벽돌 건물로 가로막힌 풍경. 빛 하나 없는 폭죽 소리만이 계속해서 들려올 뿐이었다.
새해 전야, 당시 가볍게 만나던 더치 남자는 그날 저녁 친구 집에서 열리는 더치 신년 파티에 나를 초대했다. 더치 남자를 따라 도착한 평범한 시내 이층집의 초인종을 누르자, 크게 웅웅 울리는 락 음악과 함께 집 안에 있던 누군가가 문을 열었다. 아마도 누구의 친구인지를 확인하는 더치로 된 대화가 오갔고, 그동안 뒤에서 나는 어떻게 이렇게 큰 음악소리가 밖으로 하나도 안 새어 나올 수가 있지 하고 생각했다. 외투와 짐을 입구의 옷걸이에 걸고서 더치 남자는 곧장 나를 자신의 친구들이 모여 있는 방으로 이끌었다. 열댓 명의 인원을 수용하기엔 턱없이 작은 크기의 방. 집안의 온 의자를 끌어와 빽빽하게 들어선 사람들. 벽에 줄줄이 널린 헤비메탈 밴드 로고스러운 페브릭 포스터들과 테이블 위 잔뜩 널브러진 술과 플라스틱 컵. 방 한쪽 구석 티비에선 종종 관객들을 비추는 음악 프로그램이 시시각각 화면을 바꾸고 있었다. 집 전체를 울리는 노래 소리의 근원이었다. 더치 남자는 새해 전야에 하는 더치 라디오 프로그램이라며, 매해 사람들이 투표를 해서 그 해의 노래 순위를 정한다고 했다. '그런데 1, 2 위는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바뀐 게 없어.' 언제나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 혹은 이글스의 호텔 켈리포니아. 티비에선 10위부터 거꾸로 올라가며 노래를 틀어주고 있었다. 유명한 노래들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일어서서 춤을 추며 따라 불렀다. 한 쪽에선 술에 잔뜩 취한 사람들이 올해의 1위가 둘 중 무엇일지 쓸데없는 내기를 했다. 나는 시끌벅적한 대화들 틈에서 간간이 들리는 영어 질문에 아무렇게나 대답을 하며 앉아 있었다. 속으론 이게 다 무슨 소용이지, 쓴 조소를 삼키면서.
나는 몇 분만 있으면 네가 살아 있던 올해가 아니라 네가 존재하지 않는 내년이 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네 죽음 이후, 시간이 지날 수록 나는 점점 더 너와 닮아간다. 너처럼 점점 더 투명해진다. 이건 네가 좋아하던 것, 이건 네가 싫어하던 것, 일상의 매순간 너를 발견하고 너를 생각하고 너를 느끼다가. 어느 순간, '잠깐만 네가 이거 진짜 좋아했나?' 그러나 이제는 답을 물어볼 사람도 없어서.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는 우리.' 나는 그렇게 내가 내린 답을 정답이라 믿기로 결정했다. 어색함을 숨기려 테이블의 와인을 계속 홀짝인 탓에 나는 점점 취기가 오른다. 눈 앞엔 한껏 취한 외국인들의 과장된 웃음과 우스꽝스러운 몸짓. 창밖엔 여전히 불꽃놀이가 쉴 틈없이 터져 댔다. 어느 지점을 지나자 나는 너와 관련한 내 모든 생각들이 너에 대한 것이 아닌 나 자신에 대한 것이라는 착란에 이른다. 너라는 사람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결국 모두 나였을 뿐이라고. 나의 자아와 너를 생각하는 나는 서로가 끝없이 뒤엉키고. 너는 지금 어디에 있지? 불현듯 떠올랐던 내가 네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내 거품처럼 무너져 내린다. 나는 다시 너로, 네가 되어가는 나로 돌아온다. 앞으로 나는 이렇게 너를 평생 내 몸에 지닌 채 살아가게 될까. 내 잊혀진 과거처럼 너의 존재를 점점 잊어가며, 더이상 네가 아닌 네가 되어가며, 그렇게 점점 무거워지는 2인분의 몸을 이끌고 살아가게 되는 걸까.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는 우리.
나는 언제나 우리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정을 몇 분 앞두고 티비에선 보헤미안 랩소디가 흘러나왔다. 올해 1위는 퀸의 차지였다.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들었을 노래의 가사를 여전히 흥겹게 따라 부르는 더치들 뒤로, 어느새 티비 화면엔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고 있었다. 밖은 새해까지 남은 그 십 초를 기다리지 못해 이미 수백개의 폭죽으로 가득 찼고. 모두의 입에서 터지는 알 수 없는 괴성과 함께. 마침내 새해가 온다. 파티의 사람들은 서로 껴안고 악수하고 키스를 퍼붓다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밖으로 우르르 몰려 나갔다. 하늘은 밤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번쩍이는 빛들과 굉음으로 가득했다. '전쟁이 난다면 이런 기분일까.' 그건 마치 세상의 종말, 아포칼립스의 광경.
'Gelukkig nieuwjaar!'
골목 맞은 편에서 길가로 폭죽을 던지고 놀던 사람들이 파티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Gelukkig nieuwjaar!' 파티 사람들도 양손을 높이 흔들어가며 거리낌 없이 화답한다. 하지만 나는 아무리 들어도 그 발음을 따라 할 수가 없어서. 혼자서 어설프게 외치는 'Happy New Year!' 그 말을 듣는 또한 어설픈 미소가 내 앞을 스쳐간다. 그렇게 모두의 기쁨와 함께, 끝내 해피뉴이어. 네가 그토록 경멸하던 새해가 되었다. 행복한 새해. 이제 너는 여기 없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나는 잠시 눈 앞 골목에서 사람들이 터뜨리는 폭죽을 바라보다, 집 입구에 걸어 놓은 외투와 짐을 챙겨 자전거에 올랐다.
집으로 향하는 길목의 큰 사거리엔 사람들이 동그랗게 원을 그려 북적이고 있었다. 사방으로 길게 펼쳐진 사람들의 그림자. 그림자들 틈 사이로 미세한 불빛들이 새어 나왔다. 그 빛에 이끌려 나는 자전거를 근처 아무데나 세운 뒤 인파를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골목 한가운데에는 사람 키에 가까운 거대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누구도 도시에서 보리라 예상하지 못했을 마치 거짓말 같은 커다란 불이었다. 불길이 땅과 맞닿은 곳에선 아마도 불의 시발점이었을 낡은 소파가 조금씩 그 형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종종 종이 박스나 나무판자처럼 보이는 것들이 소파 옆에서 함께 타들어갔다. 주변 원을 이루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불길을 바라보았다. 한 손엔 캔 맥주나 와인잔을 들고. 누군가 불 속으로 종이박스를 내던질 때마다 다같이 함성을 내지르며. 누구도 불을 끌 생각도 없이 그저 주변을 둘러 서 가만 지켜 보았다. 불이 내뿜는 빛과 열에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녹아 내릴 듯한 섬광으로 번들거렸다. 나는 그 비현실적인 풍경 앞에서 잠시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눈동자 안에는 오직 하나의 커다란 불꽃. 나는 그저 다른 모든 사람의 일부가 되어 타오르는 풍경을 가만 응시할 뿐이었다.
어느 순간 나는 불길의 가장자리에서 날아다니는 검은 재를 발견한다. 검은색 실낱 같은 재들은 여전히 밤하늘을 메운 불꽃놀이에 간헐적으로 빛을 반사하며 공중을 떠다니고 있었다. 참혹하도록 가볍게. 공기 속을 유랑하는. 적막. 그 가벼움에서 나는 어쩐지 네가 떠오른다. 불길 속으로 들어가길 선택했던, 그렇게 재가 되어 날아갔을 너의 모습이. 나는 그날 가루가 된 너를 받아 들고 네게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너는 이곳에서도 늘 내 곁에서 함께할 것이었다. 내가 마침내 너를 놓아줄 수 있을 때까지. 그러나 그 언젠가가 정말 오기는 하는 걸까? 그 언젠가가 정말로... 나는 멀리 밤하늘로 차갑게 사라지는 재를 바라본다. 그리고 마침내 상상만 하며 미뤄왔던 우리의 여행을 결심한다.
'가자, 수아야.'
나는 몸을 돌려 원을 그린 사람들 틈으로 사라진다. 뒤에선 여전히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