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NN. NN. 201N

너의 일기

by 수아

누군가와 오랫동안 이야기하는 것은 무척 기분 좋은 일이다. 물론 마음이 맞는 상대와 따뜻하고 밝고 편안한 장소에서, 얘기하고 싶은 주제로 얘기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겠지만. 직장 상사와 회식 자리에서 하는 일 얘기나 담임 선생님과의 성적 상담을 오래 나누고 싶은 사람은 아마 없지 않을까? 나의 경우에는 언니와 늦은 밤 언니의 방에서 나누는 얘기가 기분 좋은 긴 대화일 것이다.

자매 사이의 관계는 독특하다. 나와 언니에게 '언니를 (혹은 동생을) 사랑하시나요?' 라고 묻는다면 두 명이 동시에 '아니요'라 답할 것이다. 요즘에는 두 명 다 각자의 일로 바빠서 못하지만 얼굴만 봐도 싸우던 시기도 있고 서로에게 말로 못할 욕을 퍼부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 대신 서로에 대해서 놀라울 만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죽이 맞을 때에는 완벽한 대화 상대가 된다.

금요일이나 토요일 밤, 일찍 자기는 싫은데 놀거리가 없다. 혼자 있으니 괜히 심심하고 할 일이 없다. 이런 날에는 엄마 몰래 방에서 나와 언니 방문을 두드리고는 한다. 언니는 역시나 분홍색 커버의 아이패드를 손에 쥔 채 침대에 누워있고 쿠키는 그 옆에서 얌전히 자고 있다. 침대는 전기 장판이 틀어져 있어 따뜻하다. 책상 위에 부숴서 스프를 뿌린 라면 사리나 감자칩, 콜라병이 놓여 있으면 오늘 밤을 보낼 준비는 완벽하게 끝이 난다.

처음에는 가볍고 일상적인 얘기로 시작한다. 보통 언니가 새로 산 옷이나 가방을 자랑하거나 학교에서 있었던 웃긴 얘기가 주가 된다.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연예인의 스캔들, 새로 방영되는 드라마, 웃긴 학교 선생님에 대해서 느슨하고 쓸데 없는 잡담이 이어진다. 언니는 나에게 예능 영상이나 드라마를 보여주는 것을 좋아하는데, 솔직히 흥미는 없지만 참고 같이 봐준다. 내가 새로 발굴한 노래들을 들려주기도 한다. 역시 언니는 듣기 싫어도 이어폰을 받아 든다. 관심 없는 티를 내면 대판 싸움이 일어날 것을 둘 다 알기 때문이다.

영상을 보면서 혹은 노래를 들으면서도 우리는 쉴 새 없이 떠든다. 대화 중간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설명하면서 위선적인 말을 해버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서로를 너무 잘 아는 두 사람은 내 앞의 이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할 지 그 자신보다 앞서 파악한다는 것을, 상대방 또한 그러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잠깐의 정적 속에서 나는 언니가 말꼬리를 잡고 나를 놀릴 가능성에 대해 따지고 있고 언니는 자신이 그랬을 시에 내가 화를 내거나 삐질 확률을 셈하고 있다. 결국 언니는 말꼬리를 잡지 않았고 일어날 뻔한 작은 전쟁은 불발로 그쳤다.

새벽 두 시. 창밖은 어둠보다 더 깜깜하다. 우리는 한 밤의 파티에 출출함을 느끼면서 방을 빠져 나간다. 위잉거리며 돌아가는 냉장고와 정수기 소리를 제외하고는 거실은 조용하다. 너무 조용해서 바닥에서 발을 떼는 순간 화가 난 엄마가 문을 열고 거실로 나올 것 같다. 우리는 마치 적국 수장의 암살 명령을 받은 수준급 암살자들처럼 조용히 복도의 어둠 속을 헤치며 거실로 향한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다. 내가 커피스토퍼에 물을 올리고 컵에 정수기 물을 채우는 사이에, 언니는 컵라면 두 개와 수저, 김치통을 챙긴다. 마침내 우리가 그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고 환한 노란 빛을 내는 방으로 돌아오면 수상한 냄새를 맡은 쿠키가 어느 샌 가 잠에서 깨어 꼬리를 흔들고 있다.

새벽 세 시. 보통 이쯤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만 오늘은 아직 졸리지 않다. 고롱거리는 쿠키의 코고는 소리와 함께 이야기는 어둡고 진지한 곳으로 흘러간다. 우리가 즐겨 듣는 라디오에 소개된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나는 무대를 1930년의 파리의 살롱으로 옮긴다. 언니는 자신이 다니는 화방의 미술 선생님이 깨달은 환원하는 구에 대해서, 자신이 서울대 실기 기출문제에서 보았던 모든 것을 대표하는 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틴 게이퍼드, 양혜규, 파트릭 모디아노와 하루키의 이름이 차례로 거론된다. 우리는 해변의 사나이와 흔적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지고 마는 그의 발자국이 우리가 아닐까 상상해 본다. 우리가 사들이는 모든 싸구려 니트와 청바지가, 언젠가 화려하게 빛나던 그러나 이제는 빛이 바라버린 1946년의 푸른 결혼식 드레스일지도 모른다고 소근거린다. 입에서 입으로, 그리스어에서 다른 언어로 전해져 내려간 일리아드 안에 호메로스 자신은 살아남아 있을까? 그저 수없이 많은 언어로 쓰여진 호메로스로서 그 광활한 바다를 둥둥 떠다니는 것은 아닐까? 마녀의 저주에 걸린 것처럼, 머리 속 한자락의 생각은 밖으로 나오는 순간 초라한 더듬거림으로 변해버린다. 그러나 상대방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은 하지 않아도 괜찮다. 서로가 이미 완벽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수세기동안 훌륭한 시인들만이 부려왔던 마법과 힘을 평범한 두 자매의 대화 사이에 슬쩍 끼워 넣는다.

동이 트고 새들이 지저귄다. 아파트 벽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줄기에 지난 밤의 마법은 깨져버렸다. 우리는 새들에게 몇 마디 욕을 내뱉고 무겁게 늘어진 몸을 이끌어 쿠키 옆에 눕는다.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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