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MIMI 작품 비평 1 - くうになる

기약 없는 존재론적 고민 속에서 '언젠가'를 바라본다는 것이란

by 팽이트위즈
『くうになる』Thumbnail. Illust: けけ

악곡 주소: https://youtu.be/f6TytcA47rI?si=-rr3uNVzU9cjxkQz

가사 전문: 하츠네 미쿠 / 카후 / 합창

1절

嗚呼何も分からないから

憂いを数えている

きっと見えないまま落ちてった

言の葉の欠片とか


아아, 아무것도 모르니까

걱정을 세고 있어

분명 보이지 않는 채 떨어졌던

말의 조각이라던가


嗚呼寂しいから連れ出して

また月明かりの信号

じゃあねそして会えた時には

手を繋いで踊りましょう


아아, 외로우니까 데리고 나가줘

다시 달빛의 신호

잘가,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는

손을 맞잡고 춤추자


今日も今日も眠れないから

僕は僕は夜と友達

いつかいつか笑えるのなら

今だけは泣いちゃうことくらい


오늘도, 오늘도 잠들 수 없으니까

나는, 나는 밤이랑 친구

언젠가, 언젠가 웃을 수 있다면

지금 우는 것 정도쯤이야


空っぽになる心の裏が

チクリチクリ 痛いの明日も

見えないいままに 息を続ける

なんにも知らないから風になる 嗚呼


텅 비어가는 마음 속이

따끔따끔 내일도 아파오는걸

보이지 않는 채로 숨을 쉬어가

아무것도 모르니까 바람이 돼 아아


2절

嗚呼 愛しい理由も知らず

空の底見つめてる

さあね空っぽの身体には

嘘は重すぎるから


아아, 사랑스러운 이유도 모른 채

하늘의 바닥을 올려다보고 있어

글쎄, 텅 빈 몸에게는

거짓말은 너무 무거우니까


今日も今日も眠れないから

君と君と夜を囲むの

きっときっと解るのならば

今だけは笑っていいですか


오늘도, 오늘도 잠들 수 없으니까

너와, 너와 밤을 두르는거야

분명, 분명히 알 수 있다면

지금 정도는 웃어도 될까요


何時までに答えを知るの?

僕ら 僕ら息をする理由

嗚呼何時までに忘れられるの?

何にも知らないから風になるんだ


언제가 돼야 답을 아는 거야?

우리, 우리가 숨을 쉬는 이유

언제가 돼야 잊을 수 있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니까 바람이 되는 거야


空(くう)になる心の裏を

ふわりふわりゆらぎで満たす

さざ波の様な 感情二つ

ここに居る理由が欲しかっただけ


텅 비어가는 마음 속을

두둥실두둥실 흔들림으로 채워가

잔물결 같은 감정 둘

여기에 있는 이유가 알고 싶었을 뿐이야


후렴

空(くう)になる心の裏が

チクリチクリ 痛いの君も?

見えないいままに 息を続ける

なんにも知らないから風になるんだ


텅 비어가는 마음 속이

따끔따끔 너도 아프니?

보이지 않는 채로 숨을 쉬어가

아무것도 모르니까 바람이 되는 거야


最後だけ笑って頂戴

いつか いつか 報われるから

さざ波の様な 感情二つ

ここに居る理由見つけられるまで


마지막만은 웃어주길 바래

언젠가 언젠가 인정받을테니까

잔물결 같은 감정 둘

여기에 있는 이유를 찾을 때까지


『くうになる』는 2022.01.15. 첫 투고, 2023.03.29.에 재투고된 하츠네 미쿠-카후 듀엣곡으로, 2025.08.24. 기준 1100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는 MIMI의 대표곡이다. 여기서부터 MIMI의 감미로운 시적 세계를 더듬어보자.


1. 『くうになる』의 화자는 둘이다.

먼저 중요한 점은 『くうになる』가 듀엣곡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왜 하필 솔로곡이 아니라 듀엣곡인가? 이 질문에서부터 『くうになる』의 해석이 출발해야 한다. 이 점을 간과한 채로는 『くうになる』를 제대로 독해했다고 할 수 없다.

 『くうになる』의 화자는 둘이다. 그것은 듀엣곡이라는 사실에서뿐 아니라 1절 2연에서 요청과 이별의 문구, 2절 3연 2행에서 僕ら(우리)라는 시어, 2절 4연 3행과 후렴 2연 4행에서 さざ波の様な 感情二つ(잔물결 같은 감정 둘)라는 시어, 그리고 후렴 1연 2행 痛いの君も?(너도 아프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くうになる』의 화자를 무심코 단일하다고 보기 쉽지만, 그렇게 접근하면 위의 시어들을 읽어내기가 어려우며 시상의 전개 과정도 제대로 포착해 내기가 힘들다. 예컨대 『くうになる』의 화자를 단일하다고 보면, 1절 2연 寂しいから連れ出して(외로우니까 데리고 나가줘) じゃあねそして会えた時には(잘가,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는) 같은 화답 구조에서 화자가 누구에게 말을 건네는지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또한 さざ波の様な 感情二つ(잔물결 같은 감정 둘)에서 감정 둘이라는 시어가 무슨 감정을 집어서 가리키는지를 고민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くうになる』의 화자가 둘이라고 본다면 이러한 문제들은 명쾌히 해결된다. 특히 감정 둘이라는 시어를 '두 가지 감정'이 아니라 '두 사람의 감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는데, 이 경우 감정 둘에서 그 감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특정할 필요 없이 『くうになる』 전체를 감싸는 실존주의적 감정 전부로 포함적으로 정의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점에서, '화자가 둘이다'라는 관점이 굉장히 강력한 가사 해석의 도구이자 실마리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 『くうになる』의 화자를 둘로 볼 때에야, 1절에서 홀로 보내던 밤이 2절에서 같이 보내는 밤으로 그 시적 구도가 바뀌는 배경적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1절에서처럼 서로 헤어져 각자의 밤을 보내는 것으로는 존재론적 고민이 해소되지 않아, 2절에서는 두 화자가 함께 고민하여 극복해 보고자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기존에 『くうになる』의 화자는 대체로 암묵적으로 단일한 것으로 간주되곤 하였다. 이 문제는 원곡의 가사 さざ波の様な 感情二つ를 번안하는 과정에서 두드러졌다. 샨곰(ShanGOM)을 포함한 여러 번안에서는 해당 시구를 '잔물결과도 같은 두 가지의 감정'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았다. 감정 둘이라고 하니 경로의존적으로 '감정이 두 가지구나'라고 연상한 것이다. 시적 화자는 단일하다는 선입견이 시어를 집어삼킨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마땅히 의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くうになる』를 들으면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과연 '두 가지'로 딱 떨어지게 뜻매김할 수 있는가? 형언할 수 없는 것들에 기수를 부여하는 것이 가당한 일인가? 그러한 전환적 사고로부터 우리는 새로운 시적 발견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2. 『くうになる』의 핵심은 생략이다.

『くうになる』의 가사를 살펴보면 중요한 문장 성분이나 맥락들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嗚呼何も分からないから 憂いを数えている(아아 아무것도 모르니까 / 걱정을 세고 있어)에서는 무엇을 모르고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인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見えないまま(보이지 않는 채)라는 시어에서는 '무엇이' 보이지 않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今日も今日も眠れないから(오늘도 오늘도 잠들 수 없으니까)에서는 무엇 때문에 잠들 수 없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言の葉の欠片(말의 조각)이라는 시어는 무슨 말을 가리키는 것이며, 嗚呼 愛しい理由も知らず(아아 사랑스러운 이유도 모른 채)에서는 무엇이 사랑스럽다는 것인가. 이처럼 『くうになる』에서는 화자가 무엇을 걱정하고 고민하며 현재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くうになる』의 시적 미학은 바로 이 지점, 생략에서 출발한다.

시적 언어를 다룰 때에는 독자에게 세세히 모든 것을 알려줄 필요가 없다. 알려줌으로써 언어적 연결을 확정하는 순간 무한한 상상의 나래의 여지는 차단되게 된다. 고민하게 만들지 않는 시구는 아름답지 않다. 빈칸을 만들고 고심하게 하는 것에서 말꽃은 피어난다. 알려주되 알려주지 않고, 드러내지 않되 드러내는 것. 그것이 시적 사유의 핵심이다.

『くうになる』에는 수많은 여백들이 있다. 무엇을 고민하고 있고, 무엇이 보이지 않고, 무엇이 사랑스럽고, 무엇이 거짓말이 되며,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우리는 저마다의 물감과 붓을 가지고 그 여백들을 채워 나가며 하나의 완성된 구도를 그려나가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시어의 이면에 감추어졌던 숨겨진 의미를 새로이 발견하고 자기화하게 된다. 여기에 어려운 말은 없다. 대신 구체를 벗어난 추상이 존재한다. 걱정, 달빛, 바람, 사랑, 밤, 숨……. 얼마나 친숙한 단어들인가. 그래서 화자의 눈은 시인을 벗어나 우주 전체의 눈으로 승화하게 된다.


3. 『くうになる』의 마무리는 전환이다.

『くうになる』의 언어미에 점정하는 것은 전환적 표현이다. 언어적 고정관념을 벗어나 자유로운 발상으로 어휘들을 연결해 새로운 초월적 진리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시인의 역할이다. 그러한 전환을 읽으며 우리는 세계를 재인식하고 전에 보지 못했던 깨달음을 얻게 된다. 『くうになる』에서 MIMI는 수려하면서도 담백한 전환적 표현으로 충격적으로 시청자들을 매혹시키고 있다.

1연 僕は僕は夜と友達(나는, 나는 밤이랑 친구)와 2연 君と君と夜を囲むの(너와, 너와 밤을 두르는거야)라는 시구를 살펴보자. 여기서 MIMI는 두 시구를 대응시키면서 공통적으로 밤(夜)이라는 추상적 관념을 구체화하고 있다. 밤을 의인화하여 밤과 친구가 된다는 발상, 밤을 마치 이불처럼 두를 수 있다는 접근은 매우 신선하다. 절제된 표현으로 음절수(14)까지 정확히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미적이다.

다음으로 『くうになる』의 백미가 되는 영상 연출 부분을 살펴보자.

空っぽになる心の裏が(텅 비어가는 마음 속이)에서 空っぽ(텅 비어)가 한 칸씩 □□□으로 바뀌어가고, 見えないいままに(보이지 않는 채로)에서 見えない(보이지)가 한 칸씩 ×××으로 전환되어 가는 연출은 가히 압권이다. '텅 비어가'와 '보이지 않는 채'라는 가사 내용에 어울리는 기발한 언어적 전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MIMI는 전위적 기법을 활용하는 가장 이상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다. 기존의 언어 관습을 넘어서는 파격을 보여주면서도 직관적으로 어색함이 없이 와닿으며 자연스럽게 전체적인 분위기와 어우러지는 모습. 기성의 약속을 파기한다는 것은 그만한 의의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고서는 표현적으로 다른 선택지가 없는 정도에서야 비로소 파격은 빛을 발할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절제된 파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 절제미를 MIMI는 『くうになる』에서 글자를 치환하는 영상적 연출로 잘 보여주고 있다.


4. 『くうになる』의 존재론적 고민

1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くうになる』의 화자를 둘로 가정합니다. 카후 파트 화자는 줄여서 카후로, 하츠네 미쿠 파트 화자는 줄여서 미쿠로 지칭합니다.


『くうになる』의 화자의 걱정과 고민은 '모름'에서 비롯된다. 1절 1연에서 카후는 嗚呼何も分からないから 憂いを数えている(아아 아무것도 모르니까 / 걱정을 세고 있어)라고 말하고 있고, 2절 1연에서 미쿠는 嗚呼 愛しい理由も知らず 空の底見つめてる(아아, 사랑스러운 이유도 모른 채 / 하늘의 바닥을 올려다보고 있어)라고, 후렴에서는 なんにも知らないから風になるんだ(아무것도 모르니까 바람이 돼)라고 말하고 있다. 이들 화자는 무엇을 모르는가?

그 답은 2절 3연에서 어렴풋이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미쿠는 僕ら 僕ら息をする理由(우리가, 우리가 숨을 쉬는 이유)에 대한 답을 알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우리가 왜 숨을 쉬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존재론적으로 고뇌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확장시키면 『くうになる』의 '모름'은 삶의 방향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걱정을 세고 바람이 되는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에게 시간적으로 스스로와 관련한 '모름'에는 4가지 차원이 있다.

첫째, 절대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태어나기 이전의 일들에 대한 '근원적 모름'.

둘째, 태어나면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경험한 일들에 대한 '망각적 모름'.

셋째, 자신이 지금 어떠한 사람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모르는 '상태적 모름'.

넷째, 앞으로 스스로가 어떻게 흘러갈지를 모르는 '미래적 모름'.

이러한 '모름'들은 우리 모두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경험해서 기억하고 있는 것만 알 수 있고, 그 경험의 범위는 감각적으로 매우 제한된 범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정된 경험으로부터 빚어진 '근원적 모름', '망각적 모름', '상태적 모름'의 토대 위에서 우리는 '미래적 모름'을 예측하게 된다. 세 '모름' 파동의 선험적 종합으로서 우리는 그 '미래적 모름'의 파동을 감각적으로 어렴풋이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름' 파동은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지만, 그 인식 형태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것은 저마다 자기의 위치에서 마주하는 변인들의 종류, 주기, 세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적으로 마주하는 변인들의 종합적인 세기가 클수록 '모름' 파동의 진폭이 커지게 된다. 그때 우리는 불확실성의 늪에 빠지게 된다. 정해진 틀, 예컨대 교과과정의 범주 안에 있을 때 다른 변인이 없다면 우리는 훗날 스스로의 위치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틀의 바깥 속에 놓이게 될 때, 무수한 변인들에 둘러싸이면서 우리는 스스로가 어디에 위치하게 될지를 예측할 수 없게 된다. 운동한다는 것은 불안정하다는 것이고, 불안정은 걱정과 고민을 낳는다. 우리의 삶은 대체로 그러한 불안정을 해소하기 위한 발버둥이라고 할 수 있다.

『くうになる』의 화자들이 '모름' 속에서 걱정을 세고 있는 이유 역시 '모름'의 파동이 자아내는 불확실성의 불안이 마음속에서 크게 휘몰아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무언가를 안다고 생각하던 상태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이행하면서 화자는 걱정을 세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진다. 모르기 때문에 방향을 정할 수 없고, 방향을 정할 수 없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고, 움직일 수 없기에 모름이 해소될 수 없는 마의 순환고리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어서 카후는 1절 1연 3-4행에서 きっと見えないまま落ちてった 言の葉の欠片とか(분명 보이지 않는 채 떨어졌던 / 말의 조각이라던가)라고 말하고 있다. 과연 보이지 않는 채 떨어졌던 / 말의 조각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비시각적인 말이 보이지 않는 채 떨어졌다는 서술이 언뜻 보기에는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비시각적인 '말'을 시각적으로 치환하여 접근할 필요가 있다.

떨어졌던이라는 하강적 이미지에 주목해 보자. 말이 떨어져서 조각조각 부서지는 장면을 연상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장면을 곱씹어보면 '조각조각 부서진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짐작해 낼 수가 있다. 즉 말이 문장이 되지 못하고 파편화되었다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삶에 폭풍이 도래하여 무엇도 알 수 없을 때, 마침내 어둠은 찾아와 시야를 가린다. 보이지 않는 칠흑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말도 제대로 지을 수 없다. 설사 말을 억지로 발설해 보아도 곧 그 말들은 힘을 잃고 떨어져 조각이 되어 버린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걱정이 말을 상승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적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카후는 다음 연에서 미쿠에게 嗚呼寂しいから連れ出して(아아 데리고 나가줘)라고 부탁한다. 시간적 배치를 보아 외출은 낮 시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윽고 また月明かりの信号(다시 달빛의 신호)에서 말하듯 달이 떠오르며 이별의 시간이 다가왔음을 신호한다. 그리하여 두 화자는 じゃあねそして会えた時には 手を繋いで踊りましょう(잘가,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는 손을 맞잡고 춤추자)라며 작별인사를 한다. 헤어지고 다시 만났을 때에는 손을 맞잡고 춤을 출 수 있을 정도로 즐거울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밤이라는 시어가 가지는 의미를 고찰해 보아야 한다. 밤은 오늘을 정리하는 시간이자 내일을 기다리는 공간이다. 바꿔 말하면 오늘의 존재론적 탐색으로부터 내일을 건너다보는 시공인 것이다. 밤 속에서 화자들은 하루 동안 쌓인 순간들을 마음속에 켜켜이 쌓고 삶의 의미를 성찰하게 된다. 그러나 그 성찰은 언제나 무의미를 통감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밤'은 항상 방황하는 자아와 마주할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시공이다. 하지만 동시에 '밤'은 '나'의 친구이다. 그것은 '밤'이라는 시공에서만 그러한 방황하는 자아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낮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시기이다. 따라서 낮에는 방황하는 자아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가 방황 속에 놓여 있게 된다. 하지만 밤은 잠을 자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제한적 시기이다. 그러나 오히려 제약된 상태이기에 비로소 발버둥을 멈추고 방황하는 자아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밤은 일상의 압력에서 벗어난 각성의 시공간이 된다.

그 속에서 카후는 마음 속텅 비어가는 것을 깨닫고, 보이지 않는 채로 숨을 쉬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모름'을 자각한다. 하지만 자각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모름'의 불안정성 위에서 화자는 스스로를 정위할 수 없을뿐더러 밤이라는 시공의 제약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후는 なんにも知らないから風になる 嗚呼(아무것도 모르니까 바람이 돼 아아)라고 말한다.

2절에서 미쿠는 자신을 空っぽの身体(텅 빈 몸)으로 정의한다. 『くうになる』의 화자가 둘이기는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므로 카후 역시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삶의 껍데기만 남은 텅 빈 심신을 바람에 맡기면 어떻게 될까. 부평초처럼 흩날리며 제 무게조차 잊고 바람 속에 녹아들고 말 것이다. 그것이 풍화(風化)이자, 스스로를 ふわりふわりゆらぎで満たす(두둥실두둥실 흔들림으로 채워가) 버린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홀로 고민하는 것으로는 '모름'을 헤쳐갈 답을 구할 수 없었다. 이에 2절에서 두 화자 카후와 미쿠는 함께 眠れない(잠들 수 없는) 거미 속에서 夜を囲む(밤을 두르)고자 한다.

2절에서 처음 제시하는 '모름'은 愛しい理由(사랑스러운 이유)이다. 해당 가사를 한국어에서는 사랑스러운 이유, 영어에서는 the endearing reason, 베트남어에서는 dễ thương으로 번역하고 있다. 모두 일관되게 愛しい '사랑스럽다, 귀엽다'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くうになる』가 '모름'을 주제로 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해당 번역은 어색한 점이 많다. 愛しい理由も知らず(사랑스러운 이유도 모른)다고 할 때는, 적어도 내가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런데 사랑이라는 감정은 대체로 이유에 선행하여 나타난다. 일단 내가 사랑하기 시작했다면, 지금 사랑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왜 사랑스러운지 그 이유는 부차적인 것이다. 따라서 愛しい理由も知らず(사랑스러운 이유도 모른 채) 있다는 것을 문제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그 상황은 이유 없는 무구한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긍정적인 양상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맥락상 2절 1연 1행은 1절과 유비하여 볼 때 '모름'의 문제를 제기하는 부분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愛しい를 다르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사랑에서 언제나 문제시되는 것은, 그 이유를 모를 때가 아니라 그 대상을 모를 때이다. 내가 누구를, 무엇을 사랑하였고 사랑하는지 모를 때 사랑은 제 궤도를 잃고 부스러지고 만다. 그것은 자아의 존재론적 상실, 미아화에 버금가는 일이다. 사랑은 삶을 이끌어주는 힘이다. 사랑을 간직할 때 사랑은 그 자체로 방향성이 되고 내일을 기대하게 만든다. 『くうになる』의 화자는 무한한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텅 비어가며 아파오는 내일을 따끔따끔 느끼고 있다. '모름' 속에서 자기 상실감과 공허함을 표현하고 있는 화자의 전후맥락과 사랑의 속성을 고려할 때, 『くうになる』 화자의 문제성은 사랑의 이유를 모르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사랑의 대상을 모르고 사랑을 잊어가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즉 화자가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의 잔재를 어렴풋이 더듬고 있는 것으로 본다면 '모름'이란 주제 속에서 해당 구절이 자연스럽게 읽히게 된다. 이 점에서 愛しい 애틋함, 그리움으로 읽는 것이 보다 마땅하다.


미쿠는 애틋한 이유도 모른 채 空の底見つめてる(하늘의 바닥을 올려다보고 있어)라고 말한다. 높이 펼쳐진 광활한 하늘에 바닥이 있다는 평면적 치환과 역전적 사고가 흥미롭다. 空の底(하늘의 바닥)은 단순히 하늘을 세련되게 표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여기서 영상의 표현에 주목해 보자.

『くうになる』Illust: けけ, Movie:瀬戸わらび

원형 안에 별이 떨어지는 밤하늘과 빌딩이 평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썸네일 속의 인물이 마치 하늘을 올려다보는 듯하는 구도로 그려져 있는 것을 고려하면, 空の底(하늘의 바닥)이란 위와 같이 밤하늘과 야경을 평면에 투사하여 나타낸 그림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곧 화자가 올려다보고 있는 하늘의 바닥이란 단순한 하늘을 넘어 도시적 빌딩과 밤하늘의 별들이 혼재하는 전경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화자의 허무감이 오롯이 내적인 원인에서 기인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허무감은 동시에 도시적 고립과 야경의 불빛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 빛을 내어 스스로를 밝히면서 별하늘을 이루는 저들과 '모름' 속에서 어둠을 방황할 뿐인 텅 빈 화자들과는 하늘만큼의 거리가 있는 것이다.


이어서 미쿠는 さあね空っぽの身体には 嘘は重すぎるから(글쎄, 텅 빈 몸에게는 / 거짓말은 너무 무거우니까)라고 읊조리고 있다. 이 묘사에서 우리는 두 가지 장면을 연상해 볼 수 있다. 첫째, 텅 빈 몸에 거짓말이 들어가는 경우. 둘째, 거짓말이 빠져나가 텅 빈 몸이 되는 경우. 장면들의 의미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먼저 화자에게 거짓말이 무엇일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무엇도 보이지 않는 것이 화자의 객관적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화자에게 거짓말은 그 상태의 역, 바로 자신이 적어도 무엇인가를 알고 그로부터 방향을 보고 있음을 가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의 중압 속에서 존재론적 방황을 잊어버린 척하는 것, 앞으로 나아가는 척하면서 원을 그리는 것, 그러한 허식이 스스로를 기만하는 거짓말인 것이다. 거짓말로 치장한 옷은 결국 텅 빈 몸인 화자의 본질적 고민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 그 옷은 너무 무거워서 텅 빈 몸의 흔들림을 따라가지 못하고 쉽게 떨어져 나간다. 그래서 텅 빈 몸거짓말을 집어삼켜도 거짓말은 곧바로 빠져나가 다시 텅 빈 몸이 되고 만다.


희미해지는 사랑과 감출 수 없는 공허 속에서 미쿠와 카후는 함께 밤을 두르고 고통을 나누면서 세상을 향해 묻는다. 何時までに答えを知るの? 僕ら 僕ら息をする理由(언제가 돼야 답을 아는 거야? / 우리, 우리가 숨을 쉬는 이유)嗚呼何時までに忘れられるの?(언제가 돼야 잊을 수 있는 거야?)를. 기약 없는 존재론적 방황과 괴로움 속에서 오늘도 이들은 何にも知らないから風になるんだ(아무것도 모르니까 바람이 돼) 버릴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존재론적 표류 속에서도 잃어버리지 않고 있던 웃음을 향한 의지는 꺾이지 않는다. 이어서 카후와 미쿠는 空(くう)になる心の裏を ふわりふわりゆらぎで満たす(텅 비어가는 마음 속을 / 두둥실두둥실 흔들림으로 채워가)라고 말하고 있다.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채 불어오는 바람의 흔들림에 떠돌고 있을 뿐이지만 그것은 ふわりふわり(두둥실두둥실)한 느낌의 긍정적인 것이다. 何にも知らないから風になるんだ(아무것도 모르니까 바람이 되)고 맴돌면서 흔들려 가는 역경조차도 결국 언젠가 분명히 찾아올 웃음을 향한 하나의 과정이라는 마음가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카후와 미쿠가 마주하고 있는 感情二つ(감정 둘), 곧 두 사람의 감정은 さざ波の様な(잔물결 같은) 것이다. 지금은 심적으로 동요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잦아들게 되리라는 믿음이 さざ波(잔물결)이라는 시어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한 희망적인 위로는 작품 내적으로는 카후와 미쿠 두 화자가 서로에게 건네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청자인 君(너), 당신을 향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왜 『くうになる』의 제목이 '空っぽになる'가 아니라 'くうになる'인가. 그것은 MIMI가 『くうになる』에서 전하고 싶었던 것이 위로였기 때문일 것이다. 1절에서 나타나는 空っぽになる心の裏(텅 비어 가는 마음 속)의 고통스러운 막막함보다는 2절에서 空(くう)になる心の裏(텅 비어 가는 마음 속)에 채워지는 두둥실한 상승감을 사람들에게 주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겪는 존재론적 방황은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痛いの君も?(너도 아프니?)에서 드러나듯이 너도나도 경험하는 아픔인 것이다. 공유하는 아픔이란 그 자체로 존재론적인 위안이 된다. 나아가 우리는 그 아픔에 서로 손길을 내밀어 보듬으면서 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연대 속에서 우리는 언젠가의 잦아듦을 꿈꾸면서,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는 동시에 순간의 웃음을 놓치지 않는 정신을 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처럼 1절의 하나에서 시작한 고민이 2절에서 둘로, 나아가 '너'의 전체로 확대되어 가는 모습에는 나눔으로써 시련을 견뎌낼 수 있다는 MIMI의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다.

그래서, 마지막에 MIMI는 말한다. 最後だけ笑って頂戴 いつか いつか 報われるから(마지막만은 웃어주길 바래 / 언젠가 언젠가 인정받을테니까)라고.


존재의 이유를 찾고자 하는 방랑자의 막막함에게, 그 흔들림조차도 언젠가의 웃음을 향한 잔물결과도 같은 과정이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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