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실버라이딩북과 오래된 친구, 고향
현실에 마주하는 공간공간마다 영화가 생각나는 순간이 있다.
실버라이닝 플레이북 .
오랜만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공간과 감정이다. 여름이나, 봄날에 얇디 얇은 옷을 입고 혼자 커피를 마시며 이 곳에서 영화를 보고 싶은 공간이었다.
사랑하는 내 친구는 척척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친구였다. 우리는 여섯에서 넷에서 그리고 둘만이 남았다. 그녀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바로 영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이 커다란 스크린 화면에 나오는 공간이었고 나의 사색은 친구와 이 영화로부터 시작되었다.
영화를 보고 난 뒤의 여운보다, 현실에 마주하는 공간공간마다 영화가 생각나는 순간이 있다. 그럴땐 살이 돋도록 영화가 와 닿는다. 그게 바로 오늘이다.
처음이 아니라 첫 경험이 아니라 상처로 가득한 마음에 다시 한번 더 사랑과 마주하게 될 때, 다시 한번 더 상처로 가득한 마음이 누군가로 인해 치유되려고 할 때. 보통 우리가 마주하는 감정은 불안함이다.
잔잔한 마음이 요동칠 때, 그것을 주체할 수 없을 때마다, 또 다른 상처로 염려될 때마다 우리들이 느끼는 걱정, 공포는, 참으로 못견디게 아프다. 이 영화는 상처로 가득한 사람들이 다시 사랑을 느끼는 불안과 똘기를 표현한, 다시 봐도 그런 영화였다.
영화는 창문밖 너머로 상영되고 있었고, 나와 그녀와 알음알음 대화마다 끊어지는 짧은 찰나의 순간은 나를 못견디게 괴롭혔다. 찰나의 순간은 영화로 매워졌다.
영화와 커피, 음악, 사색, 침묵이 난무한 이 공간에서 친구의 눈은 유달리 척척했다.
참 많은 일들을 겪었다. 우린 각자 아직도 그 일은 '잘 모르겠다' 라고 말했었다. 우린 우리 각자의 슬픔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애써 표현하지 않아도 느끼는 순간의 마찰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고 말하지 않아도 위로 할 수 있었다.
못견디게 괴롭다는 것, 그것은 우리의 상처를 받아들이고 치유할 때부터 시작된다.
그러니까 나는 친구를 만나러 무작정 여기로 왔더니, 실로 오랜만에 고향에 드른 것을 깨달았다. 대화의 끝이 흐려질 때마다 우리 각자의 슬픔을 마주하였다. 익숙했던 내 고향은 참 낯설었다. 영화의 순간처럼 나는 또 한번 익숙함을 낯설음이라는 새로운 감정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익숙한 것, 우리가 가진 상처를 새롭게 맞이할 때의 불안, 초조로 나는 오랜만에 기나긴 사색을 시작하였다.
많은 것들이 떠난 공간이었다. 내가 살았던 내 고향. 내 상처와 슬픔이 담긴 곳, 친구들과의 추억과 아픔이 담긴 곳. 나는 이곳으로부터 발을 담그지 못하고 떠나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낯설어진 그 공간들을 돌아보고 싶어 버스 뒷 쪽에 앉았더니, 전부 2인석 뿐이었다. 이 버스는 왜 이토록 유달리 사람이 없는 걸까를 생각했다. 창너머 공사중의 이정표엔 사람의 상징이 혼자서 삽을 들고 우두커니 있었고, 어둡고 어두운 길들을 후비고 후비며 헤쳐놓은 이 버스에서, 가방 속 헤르만헤세의 '데미안'은 얼마나 남은 운명들을 이야기하는 것인가를 고뇌했다.
아무래도 나는 잘못탄 것 같다.
내가 고향을 떠난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아무도 누구도 없는, 우두커니 있어야 할 이 곳이, 한참을 앓던 내 병을 돋게 할 것 같아서, 상처를 꺼내어 바라보아야 해서, 슬픔을 이해해야 해서, 그럼에도 다시 익숙한 것을 사랑하려니 불안하고 초조해서,
오랜만에 고향을 방문했더니 너무 낯설도록 새로워서.
나는 아무래도 이 공간을 다시 떠나야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