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21. BEO - 지나고 보면
“요즘 잘 지내?
아, 물론… 아주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오랜만에 연락이 온 사람들의 안부 인사는 비슷비슷했다.
잘 지내냐고 습관적으로 물으려다가, 요즘 SNS나 주변에서 네 사는 얘길 들어보니 너무 잘 지내는 것 같아서 굳이 ‘잘 지내냐’고 묻기가 민망하다며 웃었다.
나도 애써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
“아주 잘 지내요. 물론 제 기준에서는요.
사는 게 지금 딱 재밌거든요.”
당신은 심플한 사람인가요?
그 질문에 나는 늘 ‘네’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나는 예전부터 ‘심플해지고 싶다’ ‘단순 명쾌해지고 싶다’는 류의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건, 내가 그 ‘심플하고 단순 명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늘 마음속으로는 스스로 인정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요즘은 그 질문에 ‘네’라고 대답할 수 있다. 적어도 내가 살아온 인생에서만큼은 최대로 심플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회사에 입사한지는 3개월이 지났다.
회사에 있는 동안에는 다른 일을 하거나, 유튜브나 인스타를 보거나, 카톡도 별로 하지 않는다. 이곳에 있는 시간 동안에는 이 시간을 탈탈 털어 내가 가진 120%를 발휘하고 싶기 때문이다.
출근 전 아침이나 퇴근 후 저녁 시간은 최대한 쪼개 PT를 받거나 개인 운동으로 땀을 낸다. 운동이 끝난 후에는 주문받은 그림 작업을 하고, 평일에도 1번 정도는 저녁에 친구들을 만난다.
주말엔 서핑이나 페스티벌, 연기 수업처럼 흥미롭고 새로운 것들로 꽉 채워 보내고, 매주 사람들을 만난다. 종종 익숙한 사람들을 만나고, 꽤 자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만약 내 시간과 에너지를 모조리 담을 수 있는 한정된 크기의 상자가 있다면, 요즘은 그 상자가 빈틈없이 빼곡히 차있는 느낌이다.
게다가 상자에 들어간 각각의 것들은 그 모양과 크기가 운 좋게도 딱 맞아떨어져서, 뭔가를 더 밀어 넣고 싶어도 더 이상 빈 공간을 내주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의 이 구성이 나에게는 완벽하다고 느껴진다. 무언가를 더 넣지 않아도 괜찮은, 딱 완벽한 패키지인 것이다.
무엇보다 여기엔 ‘너무 하기 싫지만 억지로 해야 하는 것’이 없다. 어쩌면 이제 이 상자를 나의 ‘루틴’이라고 불러도 만족스러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루틴’이라는 건 반복되는 일과 같은 거 아니야? 친구를 만나고 여가를 즐기는 건 때때로 열리는 이벤트지, 어떻게 그게 일상이고 루틴이 될 수 있어?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이것이 나에게 맞는 루틴이라고 느껴진다. 그 말은, 이 일정들 그대로를 몇 달씩 해나가도 너무 벅찰 만큼 에너지가 소진되지 않고, 에너지가 소진되는 만큼 동시에 충전될만한 여유가 있는 일정이라는 뜻이다.
아마 이보다 한가한 루틴이라면 나는 빈 시간들을 무료하다고 느끼거나 무언가로 채워 넣기 위해 불안해했을 것이다. 반대로 이보다 더 꽉 짜인 루틴이었다면 아마 소화하기에 벅차 나가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루틴은 내 에너지를 충분히 쓰면서도, 동시에 또 회복하게 만드는 것들로 채워져 있는 일상인 것이다.
이렇게 딱 맞게 (물론 나라는 사람에게 한정하여) 짜인 루틴 덕분에 요즘의 나의 일상은 매우 심플해졌다.
이제야 알게 된 건, 사고가 심플해지기 위해선 먼저 일상이 심플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일상이 심플해진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에게 가장 잘 맞게 짜인 일상을, 뭔갈 더하거나 빼기 위해 고민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그대로 이어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덕분에 얻은 몇 가지 좋은 변화는, 나의 모습이 내 스스로 만족스럽다고 느껴진다는 것,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이 남들에게 외적으로 보이는 모습과도 어느 정도 일치해간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내 일상이 충분히 만족스러우니 다른 사람의 일상을 그리 부러워하지 않게 된다. (물론 사실은, 여전히 때때로 누군가의 일상이 부러워질 때도 있다.)
지금만큼 나에게 딱 맞는 루틴을 만들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시간과 에너지로 만든 상자에 그 크기와 모양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들을 넘치도록 밀어 넣고, 찌그러뜨리고, 다시 우르르 쏟아내 버리는 과정이 지겹도록 반복됐다.
무엇보다 문제는 그 상자의 크기를 알지를 못했다. 나라는 사람의 일상에 일과 인간관계, 새로움과 익숙함이 어느 정도의 비중으로 들어가야, 내가 만족하고 지치지 않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자꾸만 뭔가가 모자란듯해 밀어 넣었다가 토해내고, 또 다른 것들을 밀어 넣으면서도 불안했다.
하지만 결국 그 상자의 크기를 알 수 있게 만든 건, 억지로 구겨가며 밀어 넣어본 시간과 경험들이었다.
어떤 모양을 어떤 크기로 채워 넣어야 이 상자가 딱 맞게 채워질 수 있는지에 대한 감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면 테트리스도 결국 많이 해본 친구들이 끝판을 깨는 법이다.
잘하든 못하든, 흥미가 있든 없든 시도해봤던 무수한 경험들,
사회생활 7년 차지만 각자 다른 분야의 4개 회사를 거친 일관성 없는 경력,
밥을 벌어먹기엔 애매하지만 취미로든 일로든 꾸준하게 끌고 왔던 사소한 재능,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모양이 다듬어지기 위해 필요한 시간들.
눈앞에 놓인 완벽한 상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지난 시간 동안 쌓아왔던 것들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결국 나의 지난 시간들이 모여 어느새 나를 만드는 거라는, 너무 뻔해서 기억할 의지도 가져본 적 없었던 어른들의 말에 공감하게 되는 요즘이다.
https://youtu.be/0zlo7I1xVBs
오늘은 노래에 글을 붙이는 것이 아닌, 요즘 가장 많이 하던 생각에 가장 어울리는 노래를 붙여봤어요.
어느 때보다 하루하루가 심플한 요즘의 일상과 생각을 수플레에도 한 번 남겨두고 싶었거든요.
요즘 출퇴근길에 이 노래를 거의 매일 반복해서 듣고 있어요. 가수도, 멜로디도 좋지만 가사를 여러 번 곱씹게 되는 노래예요.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야, 좋았던 기억이든 나빴던 기억이든 추억이야, 그런 뻔한 얘기들을 이제야 공감하게 되는 걸 보니, 어떤 진실들에 공감하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하는 것 같기도 해요.
한때 꺾였던 나의 날개가 비가 많이 온 어느 날, 나에게 필요한 우산이 되어있었다는 노래의 가사처럼
잊고 있던 어느 날, 아주 문득 느껴지곤 하니까요.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여섯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음악에 조예가 깊거나 전문적으로 음악에 대해서 잘 아는 '음. 잘. 알'들은 아닙니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고 혼자만 듣기엔 아까운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일 뿐이죠. 비가 오는 날엔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음악을, 너무 추워서 어딘가에 숨고 싶을 땐 숨어 듣기 좋은 음악을 한 편의 글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글에 담긴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읽어 내려가시길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