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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Jul 21. 2023

Big Yam Dreaming (감자의 꿈)

그림도 하나의 과정일 뿐

http://www.kiho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41360


검은 바탕에 흰색 선이 어지럽게 가득합니다. 식량이 귀하던 시절 식구들을 넉넉히 먹이는 것이 아름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양(羊)이 많으면(大) 먹을 걱정, 옷 걱정 없이 겨울을 날 수 있었기에 두 글자가 만나서 아름다울 미(美)가 되었습니다. <Big Yam Dreaming>이란 제목에는 야생 감자가 많이 자라 원주민들이 식량 걱정 없이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땅 속에서 감자줄기가 얽히고설킨다는 것은 풍성한 결실을 맺기 위한 자연의 섭리입니다. 감자와 마찬가지로 얽히고설키며 사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호주 원주민 에밀리 카메 킁와레예(Emily Kame Kngwarreye, 1916~1996)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함께 하면서 자연의 패턴을 몸에 체화했습니다. 그녀는 사전 밑그림은 물론 의도된 구도나 그리는 방향도 정하지 않은 채 캔버스 위에 앉았습니다. 바닥에 놓인 캔버스를 오가며 몸에 체화된 패턴을 자유롭게 화폭에 옮겼습니다. 마치 감자를 캐듯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녀는 70세가 되는 해에 처음으로 캔버스를 만났습니다. 죽기 전까지 8년 동안 그림을 그렸죠. 호주 정부는 천연염료로 옷감을 물들이는 전통을 계승 발전하기 위해 여성 원주민들에게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했습니다. 그 활동의 일환으로 그림을 시작한 그녀는 이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갑니다. 상업화된 주류 사회에 물들지 않는 그녀의 그림은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무질서한 선을 야생 감자 줄기가 성장하는 자연의 섭리로 이해한다면 그림에 보이는 흑과 백은 표면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대지와 식물, 땅과 사람이 서로 보완하고 어울리는 패턴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형화된 역할에 길들여지면 자신의 정체성을 이들 역할에 투사하기 쉽습니다. 역할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어진 것인데 그 역할을 본연의 가치로 잘못 이해하는 것이죠. 어느 순간부터는 오히려 그렇게 사는 것이 편안합니다. 따뜻한 아랫목 이불속에 숨어 찬바람 부는 바깥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쉽니다. 미지근한 온기에 매달리고 결국 냉방이 되어 삶이 바닥을 칠 때까지 자신을 가두기에 급급하죠.


현실의 고통을 견뎌낼 일상의 토대를 위해 주어진 역할을 맡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여러 가지 역할이 있을 겁니다. 그 역할이 내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여부는 내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나에게 영향을 미칠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 역할을 어떻게 소화할지 선택할 수 있어야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개척할 수 있습니다. 일상의 불안은 주위의 기대를 온전히 자신이 원하는 진실로 수용하지 못한 불균형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사유는 결국 자신의 진실을 찾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그토록 설레던 누군가와의 만남도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투사하는 일방통행입니다. 우리가 이어가야 할 사유는 대상에 기대어 표면에 천착하는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삶의 질곡으로 떨어뜨렸던 마음과 행동의 패턴을 확인하고 다음부터는 잘못된 패턴이 일어나기 전에 그것을 인식하고 방향을 전환함으로써 삶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까지 끌어내는 것입니다.


킁와레예의 그림은 시간의 장막이 찢겨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그림 같았습니다. 주류 미술업계에서 그녀에게 여러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상업성과 작품성면에서 세계적인 추상화가와 견줄 만했거든요. 그녀의 선택은 쉽고 단호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은 이웃 주민들과 함께 이 땅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평생 호주 원주민이라는 정체성을 지키며 살았던 그녀는 자연의 섭리를 하나의 패턴으로 인식했고 그 패턴을 자신의 삶에 수용했습니다. 흑백의 대립이 아닌 어울림의 패턴을 몸의 언어로 체득했기에 무질서한 선을 자유롭게 화폭에 옮길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그림은 하나의 과정일 뿐입니다. 자연과 자신이 함께 꿈을 꾸는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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