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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Aug 24. 2023

깨진 맹세

들음은 모든 중요한 것들에 이르는 문과 같다

http://www.kiho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45731

깨진 맹세(Broken vow), 1857, 테이트브리튼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은 눈을 감고 있네요.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따로 없습니다. 생각에 잠긴 채 벽에 기댄 얼굴은 평온합니다. 그녀를 비추는 햇살은 따사롭기 그지없습니다. 그녀는 담쟁이를 두른 벽에 한쪽 등을 의지한 채 서 있어요. 그 모습에서 외로움이 느껴집니다. 외로움이 보이는 순간 그녀에게만 집중되었던 시선은 전체를 더듬어 갑니다. 아! 그녀가 기댄 곳은 건물의 벽이 아니고 담이네요. 무심히 지나쳤다면 평생 벽에 기대어 해바라기 하는 여인으로 기억했을 겁니다. 담 왼쪽으로 나무로 된 문이 눈에 들어옵니다. 부서지고 벌어진 문 뒤로 남자와 여자의 얼굴이 부분적으로 드러납니다. 머리까지 올라간 남자의 손에는 꽃이 들려 있고 여자의 손은 그 꽃을 향해 갑니다. 다른 세상을 사는 것 같은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희롱하며 웃습니다.



그제야 평온한 얼굴과 따사로운 햇살이 역설적으로 다가옵니다. 왼쪽 가슴 맡을 받히는 손에서 아픔의 깊이가 느껴지네요. 담 모서리를 잡은 손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녀의 마음입니다.

'세상 모든 게 변해도 너만은 변하지 않을 거라 믿었는데'

언젠가 들었던 사랑의 속삭임은 더 이상 그녀의 몫이 아닙니다. 상처받은 마음은 이제 회복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녀는 화내지 않았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도망치지 않았죠. 씩씩거리는 숨소리 한 번 내지 않았습니다. 들킬까 두려워 울음은 안으로 삼킵니다. 남은 건 어쩔 수 없는 평온뿐입니다. 필립 캘더른(Philip H. Calderon, 1833~1898)의 <깨진 맹세>입니다.


미야모토 테루의 <밤 벚꽃>에서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중년의 아이코도 젊은 시절 비슷한 아픔을 겪었어요. 아이코는 일 년 전에 외아들을 잃었습니다. 더 거슬러 십 년 전에 이혼했습니다. 하루는 벚꽃이 잘 보이는 방에 하룻밤 묵게 해 달라는 가난한 신혼부부에게 이층 방을 내줍니다. 벽에 기대어 그들의 속삭임을 엿들으며 과거를 회상하죠. 그때도 벚꽃은 피었고 사랑도 피었습니다. 많은 것을 내려놓은 아이코는 이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이 소중합니다. 그때는 아파하는 자신을 살필 여유가 없었어요. 눈앞에 현실은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거든요. 스물아홉의 아이코는 바람을 피운 남편에게 단호하게 헤어지자고 말했습니다. 많은 것을 내려놓은 지금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신혼부부의 속삭임을 뒤로하고, 지는 밤 벚꽃에 현재의 자신을 비춰 봅니다. 꽃이 지듯 또 하루가 멀어져 갑니다. 그녀는 지금이라면 어떤 여자라도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설득하지 않고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콩 한 조각 술 한 모금도 예외가 아니죠. 이 정도야 괜찮다고 자신을 설득한 후에 가능합니다. 못난이도 내 사랑이 될 수 있는 건 겉모습 말고 그녀만이 가진 매력이 나를 설득했기 때문입니다. 눈을 떴지만 다시 누워 버리는 것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포기가 나에게 먹혔기 때문이고요. 자기 설득과 타협이 되지 않으면 늦잠은 불가능하죠. 자기와 타협한 후에 내린 선택의 합이 바로 자신의 삶입니다. 선택의 자유가 없다면 자신의 삶은 존재하지 않아요. 자기의 이유로 선택된 삶은 그나마 견디기 수월하지 않을까요? 단호하게 선택했던 삶마저도 아이코는 후회했어요.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아픔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평온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그녀의 시선은 문 뒤의 남녀를 떠나 자신의 내면을 향합니다. 땅에 뿌리를 내린 채로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서서 살아있기에 동행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아픔을 바라봅니다. 철학자이자 시인인 마크 모네는 ‘들음은 모든 중요한 것들에 이르는 문과 같다’고 했습니다. 문 앞에 서서 마음의 문을 두드립니다. 두드리는 것은 곁의 자리에서 공감해 주는 것이지요. 경청과 공감은 기다리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눈앞의 현실에 급급해 닫힌 문을 부수고 들어가 선택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자유의지로 문을 열고 나올 수 있게 지켜봐 주는 것이지요. 경청과 공감을 통해 정서가 안정되면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공포와 분노로 연결 짓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결국에는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감당할 힘을 얻게 됩니다.


그녀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이 필요할까요? 현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 곁을 지켜준 정혜신 박사는 <당신은 옳다>에서 조언, 충고, 평가, 판단만 하지 않아도 공감의 절반은 시작된 거라고 말했습니다. 지금은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그녀를 지지하고 기다려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 평온한 시간이 그녀에게 강요된 선택이 아니라 이해의 과정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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