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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Jul 09. 2023

기억 왜곡

http://www.kiho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38664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불완전한 인간의 시선을 묘사한 권여선의 단편 <실내화 한 켤레>에 나온 대목입니다. 원시를 가진 주인공이 멀리 있는 행운은 잘 알아보는데 정작 자신 주변의 불행은 알아보지 못한다는 설정이 매력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바둑에서 대국이 끝나면 승부를 떠나 다시 처음부터 한 수씩 재현하는 과정을 복기라고 합니다. 조직에서도 과제가 끝나면 복기를 합니다. 처음부터 끝을 되짚어가면서 성과와 반성을 하고 다음 과제를 기약합니다. 성과는 우리가 무엇을 잘하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잘했던 것을 더 잘하게 하는 것은 비교적 수월합니다. 반성은 알면서 놓친 것과 몰라서 놓친 것을 구별해서 살핍니다. 몰라서 놓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다만 이번에는 몰라서 놓친 것이지만 다음부터는 알면서 놓친 영역에 포함됩니다. 그렇다 보니 과제가 반복될수록 알면서 놓친 것들만 가까이에 남습니다. 실패의 원인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감히 맞서기 어려워 누구도 탓하지 못했던 것들이죠.


이럴 때면 조직도 살아 움직이는 생물 같습니다. 자신의 이면과 마주하고 싶지 않은, 그래서 다만 기도하는 우리처럼요. 책임자가 가까이 있는 문제를 방석처럼 깔고 앉아서 해결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유일한 처방은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벌어지는 문제의 장면을 기억에서 지우고, 멀리 있는 행운의 풍경만 기억한다면 종국에는 삶의 고삐를 이방인에게 내어주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불완전한 시선은 우리 삶을 굴곡지게 합니다.


눈앞에 펼쳐진 웅장한 자연을 캔버스 위에 그대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은 자연을 그대로 그리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하니 원뿔, 원통, 구의 형태로 대상의 본질을 그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연이 보여주는 다양한 표정 중에서 인상에 남은 단 하나의 순간을 기억합니다. 그다음은 선택의 몫입니다. 아는 것만 눈에 들어오고 인식한 것만 머릿속에 이미지로 남습니다. 눈앞에 벌어지는 장면 하나하나가 다 기억된다면 난장판이 된 기억의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겁니다.


우리 두뇌에는 망각을 허용하는 메커니즘이 시시각각 작동합니다. 필요한 것만 취하고 의미 없는 것은 버리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갑니다. 선택에 따라 기억에 남은 대상은 생략되거나 과장됩니다. 기억이 왜곡되기 시작하는 지점입니다. 우리 기억은 머릿속에 드문드문하게 맞춰진 퍼즐 조각과 같은 모습으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떠올릴 때 우리의 마음은 빈 공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일목요연하게 이야기가 되지 않는 기억으로는 다른 사람은커녕 자신도 설득하기 어렵습니다. 빈 공백은 추측이라는 과정을 통해 채워집니다. 이렇게 맞춰진 이야기가 곧 나의 기억이 됩니다.


전체적인 개연성에 따라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정신의학에서는 개인의 우화(personal fable)라고 합니다. 외부 자극에 쉽게 오염되는 기억은 저장된 시점보다 꺼내는 시점의 감정과 의지 그리고 주위 환경에 더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기억은 현재의 내가 기대하는 시선으로 왜곡될 개연성이 높습니다. 왜곡된 기억에 기대어 자란 기대는 현재를 반영하지 못합니다. 왜곡된 기억과 근거 없는 기대의 합인 나는 온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나의 기억은 왜곡으로 치닫는데 화가의 기억은 명화로 남습니다. 우연과 필연이 교차하는 화가의 시선은 순간의 표정을 놓치지 않습니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수련 연작을 250여 점이나 그렸습니다. 모네에게 진실은 찰나의 순간에 담긴 빛이었습니다. 그래서 찰나의 순간은 매번 다르게 다가옵니다. 여명, 낮, 석양이 다릅니다. 흐린 날, 안개 낀 날, 맑은 날이 다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다릅니다. 모네의 그림은 찰나의 기억이지만 그림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을 연작으로 남겼습니다. 폴 세잔은 클로드 모네를 ‘신의 눈을 가진 유일한 인간’이라고 했지요. 모네처럼 바라본다면 기억은 왜곡될 리 없습니다.


"나의 유일한 스승, 세잔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이 글에는 세잔을 존경하는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세잔은 르네상스 시대 이래로 화가의 시선을 지배해 온 원근법을 거부합니다. 실재하는 3차원의 세계를 2차원 평면에 표현하기 위해 고안된 원근법은 화가에게 단 하나의 눈을 강요합니다. 가까운 것은 크고 선명하게, 먼 것은 작고 흐리게 그려서 거리감과 입체감을 줍니다. 풍경은 하나의 소실점으로 모이고 사라집니다. 하나의 관찰자를 향해 정돈되는 것이죠. 화가와 같은 위치에 선 관객의 시선도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의 눈으로 본 대상과 풍경은 진실과 실재가 아닌 환영으로 존재합니다.


인간은 하나의 눈으로 대상을 보지 않습니다. 화가의 시선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빛에 따라 대상은 쉼 없이 변합니다. 세잔의 그림에 나오는 사과 하나하나는 다른 각도와 위치에서 그려져 한 화면 속에서 우연히 만난 것 같습니다. 접시와 책상에 놓인 사과지만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은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정면에서 그림을 보면서도 여러 방향에서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곧 흩어질 것 같은 불안감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킵니다. 마치 안정과 불안정이 끊임없이 다투며 양립해 가는 과정을 담아낸 듯합니다. 그린다는 것은 단순히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세계를 창조적인 형식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 세잔이 추구한 진실입니다. 세잔이 그린 사과는 본질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부정하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본질은 대상이 가진 고유한 성질이 아니라 여러 대상 사이의 화음, 즉 관계에서 그 존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세잔은 같은 사과인데 아침에 본 기억 속의 사과와 오후에 마주한 사과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사과 하나일 뿐이라며 흘려버리지 않고 그 순간에 집중했습니다. 사과가 썩어서 버릴 때까지 그리고 다시 그리고, 고치고 또 고쳐 그렸습니다. 썩어가는 사과를 걱정하기보다 대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고착화된 시선을 고치려고 노력했습니다. 덕분에 치욕과 반성 그리고 재인식의 과정을 통해 본질에 다가설 수 있었습니다. 사과 하나로 파리를 넘어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인간이 기억하는 방식으로는 과거의 특정한 사건을 완벽하게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느 정도 버려지는 기억 방식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게 하는 순기능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날의 모든 기억을 완벽하게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 기억하는 자신을 탓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왜 어떤 것은 기억하고 어떤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프로이트는 기억이 의식에서 배제되는 것은 억압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기억을 왜곡하고 위장함으로써 의식으로부터 위험한 기억을 차단하는 검열이라는 기제가 우리 내부에 작용합니다. 반복적으로 어떤 장면을 잘못 기억하거나 기억을 왜곡한다면 나의 어떤 감정과 의지가 작동해서 기억을 오염시키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기억이 범하는 실수에 참을성 있게 반응하면서 기억이 왜곡되는 시점에 작용하는 보이지 않는 손을 알아낸다면 기억 왜곡은 삶을 변화시키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결을 찾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명화와 다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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