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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Jun 26. 2023

한 생애가 연습으로 끝날지라도

그 답은 찾아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드러나는 것

http://www.kiho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37073

 <Red>, 마크 로스코, 1970


작품명 <레드>.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가 죽기 직전에 그린 유작입니다. 빨간색 색면 덩어리 두 개가 커다란 캔버스에 물들여져 있습니다. 경계가 있는 듯 없는 듯 서로 스미는 색면은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요?


단순히 빈 공간을 채워가는 그림은 사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자가 아닌 이상 무에서 유를 뚝딱 만들어 버리는 재생은 의미를 갖기 어렵습니다. 꽃은 피고 집니다. 그 안에는 한없이 피어나고 속절없이 지는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핀 꽃이 아니라 피어나는 꽃을, 진 꽃이 아니라 스러져가는 꽃을 그릴 수는 없을까요? 정해진 답을 향해 마지못해 옮기는 걸음이 아니라 걷는 걸음마다 생동하는 그림 말입니다. 꽃이라는 하나의 형태에 시간의 흐름을 부여하는 것은 연작이라면 모를까 어려운 일 같습니다.


꽃 옆에 나비를 그려봅니다. 드디어 대상 사이에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관계가 피고 집니다. 피고 지는 관계 속에서 수많은 이야기가 탄생합니다. 빛과 어둠이 서로 스미고 벗어나듯이 그림 안의 대상들은 서로 관계하며 자신의 의미와 자리를 찾아갑니다. 그제야 우리는 일상이라는 캔버스에 활착 할 수 있습니다.


스미고 벗어나면서 서로에게 새로운 발견을 가능하게 했던 관계의 다른 한쪽에서 정형화되고 습관화된 정체가 자라납니다. 프레임에 갇히면 우리의 시선은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구체적인 형태에 매몰되면 다른 시각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꽃과 나비의 만남도 어느 순간 꽃을 찾아 날아든 나비라는 관계만 눈에 들어옵니다. 관계가 정체되는 순간입니다. 마크 로스코의 선택은 구체화된 외형을 벗은 단순화된 커다란 색면이었습니다.


그림에서 서로 스미고 벗어나는 느낌, 즉 떨림의 느낌은 색면과 색면 사이의 관계로 표현이 가능합니다. 꽃과 나비라는 형체를 버리고 색면과 색면 사이의 관계에 기대면 나와 너, 나와 대상이라는 관계가 쉼 없이 상호작용을 합니다. 정체된 관계가 다시 떨리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드디어 삶이라는 드라마가 그림에 드러납니다. 나는 지금 네모난 캔버스는 단순한 재생이 아니라 관계의 떨림을 담는 그릇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색면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로스코의 삶은 자연의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합니다. 그 자신 역시 소외된 소수자였기에 초기 작품에는 사회적 문제를 고발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러시아에서 건너온 유태계 소년에게 미국 사회는 친절하지 않았습니다. 세계를 뒤흔든 전쟁과 대공항의 시련을 겪으면서 로스코는 소통의 단절과 외로움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사회 문제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로스코는 외형을 가진 구상회화에서 벗어나 내면으로 침잠하여 마음의 치유를 이야기합니다.


색채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상호적으로 주고받으면서 의존성을 갖습니다. 광활한 대지와 높은 하늘, 흰색과 검은색, 삶과 죽음이 서로 속삭입니다. 번지고 스며들고 때로는 서로 겹치면서 구성원들 간의 만남과 헤어짐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소통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사방에서 물감을 뿌려 놓은 것 같은 그림은 관객 입장에서 보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숙제입니다. 소통하려는 시도에서 오히려 소통이 좌절되는 경험을 합니다.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죠. 새로운 시도는 점점 발전하며 복잡한 생각을 단순하게 표현하는데 이릅니다. 모네가 빛의 화가라면 로스코는 색면의 화가입니다. 커다란 사각형 모양들이 화면을 채우면서 그림이 주는 메시지는 명료해집니다. 독일의 색면화가 고트하르트 그라우브너의 말을 빌리면 자연 속에 나타나는 색은 그 자체로서 생명이며 시간의 변화를 보여주는 자연의 섭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색의 변화를 호흡에 비유했습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색채, 커다랗고 모호한 색면, 엄청난 크기의 직사각형 캔버스에 담긴 호흡 앞에서 누구는 탄식을 토하고 누구는 환희를 맛봅니다.


마음의 치유는 궁극적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고 그것이 마음에서 삶의 현장으로 이어지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시작되는 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로스코는 치유 이후의 과정을 관객의 몫으로 남겨둡니다. 그림에서 돌아서는 우리의 등에 때로는 따뜻하고 때로는 냉엄한 빛을 비춰줍니다.


로스코는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마음의 치유라는 종교적 체험을 가능케 한 이 마법사는 정작 자신의 방향을 찾지 못합니다. 명성은 얻었건만 일상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아내와의 별거, 함께 그림을 그렸던 동료와의 갈등에 몸마저 생명을 잃어갑니다. 서로 관계하며 활착 했던 일상은 무너졌습니다. 더욱이 당시는 자기 고백적인 추상표현주의 시대는 저물고, 시대의 단면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팝아트 같은 포스트모던이 떠오르면서 시대정신마저 로스코를 외면합니다. 일상의 떨림을 담지 못하는 캔버스는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과거의 답습을 거부하는 화가의 자존심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그래서일까요? 로스코의 염원이 담긴 붉은 색면은 가슴 떨리듯 아름답습니다.


삶은 비극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자기 자신을 비극의 한가운데에 세웁니다.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자주 놓칩니다. 답을 찾기 위해 하얗게 지새운 밤도 극적이지만, 의미를 찾지 못한 채 다시 맞는 새벽은 상황을 더욱 비극적이게 합니다. 하루하루 비극과 손을 잡고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합니다. 로스코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비극의 허리를 붙들고 끝 모를 사투를 벌였습니다. 성공 이후에 엄습해 오는 예술적 한계와 벌이는 도전이었고, 자본의 논리에 예술이 지배당하는 세상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극 중에 주인공은 끝내 무너지고 비극미는 극에 달합니다.


인류의 공감 능력은 진화의 산물입니다. 상대의 아픔을 보기만 해도 내가 직접 그 아픔을 겪을 때 뇌에서 벌어지는 것과 동일한 과정을 자동으로 경험합니다. 앞에 보이는 비극은 참담합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자동으로 경험할 줄 아는 우리는 그 비극 속에 자신을 세우려고 합니다. 이제 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매 순간 참담함을 각오해야 하는 보이지 않는 비극과 마주합니다. 보이는 비극에 공감하고, 보이지 않는 비극에 경건해지는 순간이지요. 비극 앞에 선다는 것은 자신의 틀을 깨고 변화에 호응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농밀하게 경험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맨 처음 뭍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쉴 새 없이 아가미를 벌컥거리다가 죽고 또 죽어야 하는 것이 우리 삶입니다. 끝없는 비극이 예상되는 그 끊임없는 반복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절실히 알고 싶은데 그게 무엇인지 누구도 속 시원히 말을 못 합니다. 하지만 그 답은 찾아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드러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붓을 들고 다시 공터에 서야 합니다. 한 생애가 연습으로 끝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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