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윌마 Jun 13. 2023

외설적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화가의 충동이 담긴 그림은 그래서 외설적입니다

http://www.kiho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35076

<The Lighthouse> 1919, Henry Scott Tuke


소년은 한동안 해변을 뛰어다녔습니다. 소년이 뛰면 세상은 멈추고 숨을 죽입니다. 마치 소년을 향해 세상이 열린 듯, 멀리서도 소년이 눈에 들어옵니다. 잘 익은 소년의 등 위로 귓불이 붉습니다. 햇살은 빛나는 육체가 자기 자리인양 소년의 어깨 위를 떠나지 않습니다. 현실이면서도 현실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 소년의 등. 나는 소년을 추앙합니다.


‘감각적이다’ 표현이 잘 어울리는 이 그림은 영국 화가 헨리 스콧 튜크(Henry Scott Tuke, 1858~1929)가 그렸습니다. 햇빛이 피부에 미치는 색채 효과를 포착하기 위한 노력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동성애를 다룬 소설 김봉곤의 <여름, 스피드> 표지에는 같은 화가의 그림이 실려서 화제가 되었죠. 그전에는 1970년대 게이 문화가 사회에 알려지면서 자주 소개되었습니다.


엘튼 존은 ‘퀸’의 리더 프레디 머큐리가 죽은 후에 머큐리에게서 선물을 받았는데 튜크의 그림이었습니다. 머큐리가 죽기 전에 자신을 위해 그림을 준비했다는 것을 알고 아이처럼 울었죠. 머큐리는 양성애자고, 엘튼 존은 동성애자입니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작품을 향한 다른 시선이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내게는 온전히 멋진 젊음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결과적으로 튜크는 남성 누드의 부활을 주도했지만 처음부터 젊은 남성의 누드를 그린 것은 아닙니다. 초기 그림에서 튜크는 신화적 맥락에 젊은 남성의 몸을 배치했는데, 비평가들로부터 다소 형식적이며 흐릿해서 맥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어촌 근처에서 자랐던 그의 기억 속에는 바다와 배 그리고 아름답고도 건강한 육체를 뽐내던 젊은 남성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합니다. 튜크는 신화적 주제에서 벗어나 햇살 가득한 바다를 배경으로 젊은 남성 누드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바다를 배경으로 빛나는 육체를 표현해야 했기에 세밀한 묘사가 아니라 윤곽을 지워내며 직관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매끄럽고 세련된 터치가 대세이던 시절이었지만 야외에서 누드를 그리기에는 빛과 함께 시시각각 움직이는 색의 미묘한 변화를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으로 표현했던 인상파 기법이 적합했습니다.


대상을 화폭에 옮기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주위의 시선이었습니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차별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때문에 야외에서 누드를 그리는데 관대한 지역을 찾아 헤매야 했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감정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주류 사회가 중시하는 가치와는 다른 차이를 끌어냈습니다. 그가 당대 주류 사회에 인정받는 이야기와 화풍에 안주한 채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청년과 바다를 이렇게 아름답게 그려낸 그림은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다름을 인정하는 화가의 충동이 담긴 그림은 그래서 외설적입니다.


그림에서 소년은 빛을 더하지만 현실에서 아이들은 빛을 잃어갑니다. 무한 경쟁에 내몰린 아이들에게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은 사라지고, 살아남기 위해 수단화된 공간만 존재합니다. 경쟁이 치열할수록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겨를이 없습니다. 버티지 못하면 사회에 무능한 인간으로 낙인찍힐 뿐이죠. 공감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다양성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현재의 틀에 맞추어 줄을 세우기에 편견과 차별은 공고해지고 주어진 길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자신의 색깔을 찾는 일은 더욱 요원합니다. 더군다나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논리는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고 사회 비판적인 목소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회,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제일 높습니다. 청소년으로 한정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합니다. 능청맞게 ‘그건 네 사정’이라고 떠미는 세상에 지쳐 아이들은 이제 부당한 사회구조를 유지하는데 일조하는 목소리를 냅니다. ‘나는 차별을 각오합니다.’ 내가 차별당하는 것을 각오하기에, 내가 남을 차별하는 것 또한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공정이라고 확신합니다. 세상의 불합리를 이 시기에 태어난 자신의 사정으로 받아들이고 차별을 각오하는 아이들 앞에서 차별은 결국 자기 자신을 차별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는 설득은 무색해진지 오래입니다.


드러난 것과 무관하게 내부를 들여다보면 예나 지금이나 불합리한 구조는 여전합니다. 젊은 시절 우리는 불합리하고 부패한 기득권에 맞서기 위해 바위에 몸을 던졌고 틈을 냈습니다. 없는 답을 찾아가는 것이기에 무에서 유를 만들어가는 데서 오는 뿌듯함은 낭만 그 자체였습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답을 찾아 고민하고 헤매는 행위는 사치에 가깝습니다. 낭만의 끝자락에서 인생선배들은 살아남기 위해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지 정답을 보여주었거든요. 안정된 수입이 보장되는 정해진 길을 두고서, 자기에게 맞는 길을 찾겠다고 나 혼자 고민하고 헤맨다? 이보다 더한 불공정은 없는 것이죠.


창량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습니다. 자신들이 세운 법과 제도 그리고 시스템으로 우리 사회를 맑게 하여 언젠가 우리 아이들은 맑은 물에 갓끈을 씻을 거라는 기성세대의 근거 없는 희망보다, 탁한 물을 인정하고 차별을 각오하는 아이들의 상황 인식이 훨씬 현실적입니다. 공정에 대한 아이들의 확신은 정해진 답을 알거나 미래를 보았기 때문은 아닐 겁니다. 무슨 계시처럼 한 순간에 얻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누적되어 쌓인 것이죠.


자신이 쌓은 성에 갇혀 그 안에서 조언과 충고를 일삼는 아빠 엄마들은 이제 아이들이 가는 길에서 비켜서주어야 합니다. 돈이 되는 길만 쫓아 자기 자신을 수단의 방편으로 삼았고, 결국 불합리한 세상을 만드는 데 부역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주류의 목소리에 묻혀 침묵한다면 차이를 인정하는 차별 없는 세상은 요원합니다. 우리는 오늘보다 외설적이어야 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연이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