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보이는 건 사슴입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사슴이 없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사슴 이미지는 대부분 생(生)과 사(死)를 초월한 듯 한 곳을 응시하는 모습입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프고, 눈망울이 호수 같아야 사슴이지요. 우리는 무심히 서 있는 사슴을 본 적이 있을까요. 동물원 울타리 너머로 먹이를 갈구하는 사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숲에서 우연히 만난 사슴 말입니다.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로 눈이 마주칩니다. 한참을 그렇게 마주 보고 서 있습니다. 무심한 것 같지만 사이에는 엄청난 긴장감이 흐릅니다. 누군가 한쪽이 움직이기 전까지 그렇게 서서 벌을 서야 합니다.
낙엽 쌓인 늦가을 어느 날, 뒷산이 시작되는 오르막길에서 사슴을 만났습니다. 사슴은 아닐 겁니다. 최고 포식자가 사라져 개체수가 늘어난 고라니겠지요. 고라니도 노루도 모두 사슴과에 속합니다. 마른 낙엽이 밟히는 소리에 까치겠지 싶었는데 사슴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설마 하는 만남에 내가 더 놀랐습니다. 상대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촉각을 곤두세운 사슴의 목은 더 길어 보입니다. 견디지 못한 내가 움직이니 사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납니다. 다시 알게 된 사슴입니다.
뒷동네 사슴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오늘 마주친 사슴은 또다시 무심히 서 있습니다. 분명히 나와 마주쳤는데 아무런 긴장감을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캔버스 안에 그려진 사슴은 내가 아는 사슴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사슴이 없습니다. 사슴이 없다면 더 이상 사슴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나는 다시 사슴을 바라봅니다. 거친 붓질로 표현된 형체는 희미해지면서 간결해집니다. 형체는 사슴이라는 환상을 벗고서 드디어 자유를 이야기합니다. 하얀 사슴은 이젠 누구라도 될 수 있겠다고 선명하게 말합니다. 환상은 사라지고 이미지가 연결하는 관계들이 그 자리를 채웁니다.
사슴은 예로부터 소통의 아이콘이었죠.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희생 동물로 쓰였습니다. 희생 동물은 하늘과 연결하는 힘이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삶과 죽음을 뛰어넘어 초월적인 공간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대신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 자리를 호랑이나 곰이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을 주는 섬김의 대상이지 소통의 매개체로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초월적인 존재라도 그 내면에 온전한 인간을 담은 존재만이 인간의 고뇌를 대변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강소 작가는 작품에 사슴, 배, 오리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배는 강의 이편과 저편을 오갑니다. 이곳과 저곳을 이어주고 소통하게 하죠. 배라는 공간 자체가 여백입니다. 여백은 곧 있을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게 합니다. 작가는 캔버스의 조그마한 여백을 허투루 보지 않습니다. 작은 붓질 한 번에 온갖 양상이 태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이죠. 소우주가 열린 것처럼 여백은 자유로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공간으로 거듭납니다. 한자 乙(을)을 흘려 그린 것 같은 형상에서는 강을 타는 오리 특유의 리듬이 느껴집니다. 유유자적 유영하는 오리들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오리는 사라지고 군무가 시작됩니다. 거기까지 이르면 오리가 나를 어디로 이끌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윤동주가 항상 끼고 살았던 백석(白石)의 시집 『사슴』에는 사슴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른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 실린 ‘하늘이 이 세상에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높고 외롭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라는 구절은 우연히 사슴과 마주친 것처럼 사람을 멈칫하게 만듭니다. 높고 외롭고, 사랑과 슬픔 속에 사는 짐승. 비단 사슴일까요. 순간 공간은 긴장감으로 휩싸입니다.
하얀 사슴이 아침마다 나를 맞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림 속에는 가난하고 높고 외롭고 쓸쓸하여, 사랑과 슬픔에 부대끼던 수많은 내가 있었습니다. 나를 온전히 살아낸 듯한 사슴은 자기가 특별하니 챙겨 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무심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죠. 그곳에는 사슴이 없습니다. 내가 있습니다. 내일은 당신일지 모릅니다.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인내하는 누구입니다. 숲을 거니는 자유로운 누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