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미궁에 갇혔다. 식인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가두려고 다이달로스 자신이 만든 미궁이었다. 빠져나갈 길은 없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다이달로스는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 우리도 저 새처럼 날개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다이달로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새 한 마리가 창공을 날고 있었다.
벽을 세우고 이곳과 저곳을 나눈 들 하늘을 나눌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열린 곳이 하늘뿐이라는 건 길이 없다는 얘기와 다르지 않았다. 하늘이 푸를수록 다이달로스 자신에게 날개가 없다는 뼈아픈 인식만 더해갔다. 다이달로스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 저 새를 보지 못했다면, 하늘은 그저 절망의 다른 말이었을 것이다. 하늘을 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거였다. 날개를 몰랐다면, 하늘을 날지 못한다는 자각은 언감생심이었다. 다이달로스는 마음을 다잡았다.
다이달로스는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의 후손으로 건축과 조각, 발명에 능했다. 미궁에서 이카로스가 구름을 가리켰다면 이 타고난 재주꾼은 날개가 아니라 근두운(筋斗雲)을 만들었을 것이다. 아니면 마법의 양탄자일지도 모른다. 다이달로스는 새의 깃털과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이카로스와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상상을 현실에 구현할 수 있는 다이달로스와 달리 우리는 날개를 가질 수 없다. 날개는 꿈같은 것이다. 인간은 꿈을 꾼다. 꿈에는 순서가 있다. 날개라는 상징은 하늘을 날 수 없다는 깨달음이 먼저고, 더 들어가 자신이 갇혀있다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미궁에 갇혀 산다. 그 처음은 자신의 가장 연한 부위를 숨기기 위해 세운 성벽이었을 것이다. 실상은 무엇이었을까. 몇 겹으로 쌓고 높이는 동안 점점 미로가 된 성은 결국 자신을 가두는 미궁이 되었다.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심연이 존재한다. 깊고 어둡고 서늘하여 오로지 감각으로만 느껴지는 심연 앞에서 우리는 자주 머뭇거린다. 심연 깊이 감춰둔 가장 연한 부위가 드러나는 순간은 고통스럽다. 고통은 남이 대신할 수 없는 일인칭의 경험이다. 혼자서 짐 져야 한다는 외로움이 가면 뒤에 숨겨진 고통의 본질이다. 고통을 주위와 나눌 수 없다는 실존적 외로움을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에게 곁이 되는 날갯짓을 시작한다.
2024년 힘겨운 세밑에서 우리를 구원해 준 날갯짓이 있다. 작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다. 일반적으로 글쓰기란 심연을 건너 당신에게 가닿으려는 작가의 노력이다. 누구인들 자신을 소설 속 주인공으로 세우고, 그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분명한 단어로 그리고 싶은 유혹이 없겠는가. 한강의 글쓰기는 사뭇 다르다. 하늘을 날 수 없다는 깨달음이 다이달로스에게 날개를 가능하게 했다면, 한강의 글쓰기는 결코 상대의 마음에 가닿을 수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것이 당신의 고통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한강은 좀처럼 상처 입은 주인공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형체가 없는 고통을 묘사하겠다는 식의 성급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한강에게 글쓰기란 세상의 폭력과 고통받는 자, 그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은 자의 아픔을 자기 몸에 체화하는 과정이다. 주위에 곁을 내주는 것을 넘어, 자기 감각과 감정과 생명을 빌려주는 일이다. 붉고 푸르게 멍든 꽃처럼 온몸에 새겨진 고통이 글이 되어 한강의 손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리라. 한강은 글을 쓸 때 신체를 사용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부드러움과 온기와 차가움과 통증을 느낀다. 심장이 뛰고 갈증과 허기를 느끼고 걷고 달리고 바람과 눈비를 맞고 손을 맞잡는 모든 감각의 세부들을 사용한다.”
한강 소설을 읽기 두렵다는 독자들을 제법 만난다. 소설에 나오는 폭력과 그로 인한 개인의 고통을 마주하기에 두렵기 때문이다. 주변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기 위해 한강은 자기 몸을 내어놓았다. 책을 읽을수록 숫돌에 몸을 가는 작가의 소모가 느껴진다. 오월도 아닌데 밀려오는 구절이 있다.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