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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면, 저절로 그만둘 수 없다

반복하면서 규율과 규칙을 찾고 내 스타일을 만들 때 비로소 자유롭다

by 윌마

http://www.kiho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38005


시작이 반이다. 그 무게감 때문일까. 첫 문장 쓰기가 어렵다. 답은 없다. 일단 쓰는 게 중요하다. 한참을 씨름하다 근사한 첫 문장을 얻었다. 둑이 터지니 몸이 글을 밀고 나간다. 원고지 10매가 금방 채워진다. 첫 문장에 전체 공력의 반을 기울였다. 시작은 반이 맞다. 애쓴 첫 문장은 다시 읽어도 빛이 난다. 첫 문장이 빛을 발하니 글 전체가 살지 않는다.


첫 문장은 말 그대로 시작하는 부분이다. 글을 짓기 위한 구상이나 문제 제기로 발을 내딛는 것이 목표다. 기승전결의 기(起)는 일어남을 뜻한다. 일어나서 발을 뗀 몸에 훈기가 돌 정도면 딱 맞다. 첫 문장을 고치느라 또 애를 쓴다. 첫 문장, 아니 첫 문단을 버렸다. 강은 건넜으니 배는 놓고 가는 게 순리 아닌가. 그것 참, 글에 생기가 돈다. ‘빛’ 나는 글은 눈을 밝게 하지만, ‘볕’ 나는 글은 몸에 피를 돌게 한다.


자크 라캉은 "인간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진다"라고 했다. 의식적으로 ‘하는 말’에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지만 무의식의 짙은 어둠을 뚫고 나오는 말에는 몸이 움찔한다. 몸속 깊은 곳에서 마그마처럼 꿈틀대다 터져 나오는 말은 ‘하는 말’이 아니다. ‘해지는 말’이다. 일상의 삶은 이상과 현실이 엇갈리고 말과 행동이 내 마음 같지 않을 때가 다반사다. 눈앞에 일어난 현상을 원인과 결과로 완벽하게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고 있구나’ 하는 현실을 깨닫고 나면 선택지는 많지 않다. 한 천재 철학자는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고 했다.


차마 말하지 못한 무엇은 몸 깊숙이 쌓이고 묵힌다. 없는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다. 지위 높은 사람은 자기의 사정을 자상하게 설명하고 변명을 한다. 중요한 건 아무리 긴 이야기라도 경청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다. 없는 사람은 자기 사정을 구구절절 다 얘기하고 살기 어렵다. 우선 변명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용기를 내서 이야기를 꺼내도 그 짧은 얘기를 들어줄 사람은 드물다. 그냥 침묵하고 욕먹을 각오를 한다.


추상(秋霜) 보다 더 무서운 게 추상(抽象)이다. 추상(秋霜)이 순간 떨어지는 불벼락이라면 추상(抽象)은 반복을 통해 자기 정체를 드러낸다. 욕과 차별이 집요하게 이어지면 사람은 주눅 든다. 결국 무기력해진다. 침묵했던 사람은 침묵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침묵하지 않았던 사람이 침묵하니 어느 날 터져 나오는 거다. 몸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그을음이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윤동주는 그의 시 ‘병원’을 쓰던 때를 떠올린다. 세상은 온통 환자투성이인데 늙은 의사는 지금 세상이 모두 정상이라고 말한다. 세상에 대고 외쳐도 돌아오는 건 메아리뿐이다. 시인은 차마 성내지 못한다. 이런 장면이 쌓이고 쌓여 어느 날 시구가 용암처럼 터져 나왔을 것이다. 글은 쓰는 것이 아니라 몸이 밀고 나가듯 써지는 것이다.


나는 글 쓰는 사람이다. 글 쓰는 사람은 글 쓰지 않았던 사람이다. 그림에세이 「나는 사랑을 걱정하지 않는다」 역시 그림이 내게 전해 준 말을 받아 적었을 뿐이다. 정작 나는 듣지 못했던 내 안의 목소리를 그림은 용케 알아듣고 내게 알려 줬다. 그림 앞에 서면 몸이 먼저 반응했다. 몸으로 써지는 글은 진실하다. 머리로 글을 쓰면 꾸며 쓰게 된다. 마음으로 글을 쓰면 격정의 순간에 사로잡히기 쉽다. 다시 읽어 보면 진심이 없는 천박함에 고개를 들 수 없다.


첫 문장은 늘 어렵다. 모든 시작이 그렇다. 정해진 틀이나 풀이 과정은 없다. 그렇다고 한없이 자유로울 수도 없다. 자기 절제가 없는 삶은 나태와 방종의 연속일 뿐이다. 반복하면서 규율과 규칙을 찾고 내 스타일을 만들 때 비로소 나는 자유로워진다. 일단 쓰자. 쓰고 또 써서 쓰기가 몸에 익숙해져서 몸이 글을 밀고 나갈 때까지 쓰자. 바람이 불면, 저절로 그만둘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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