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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믿음의 존재방식은 바로 기악이다

by 윌마

우리는 기억을 바탕으로 생각한다. 길을 걷다 맥락 없이 떠오르는 생각에 당황한 적이 있던가? 그 생각이란 대부분 잊지 못할 기억들이다. 생각은 그 사람의 기억을 바탕으로 현재를 이해하는 행위다. 일상에 이루어지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정보는 과거 경험을 통해 저장한 기억과 연결되어 재인식 과정을 거친다. 생각하는 순간마다 우리는 기억을 회상하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재구성한다. 기억을 추적하는 일은 과거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현재의 자기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다.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과거는 잊고 현재와 미래만 생각하자.’ 현재에 집중하고 미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무엇을 잊자고 하는 건 그 무엇이 쉽사리 잊히지 않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과거는 쉽사리 지워지지만, 잊으려 노력한다고 해서 잊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과거를 잊자는 다짐은 과거의 기억 속에 매몰되지 말자는 뜻에 가깝다. 과거는 밀도 있게 파고들어야 하면서도 동시에 갇혀서는 안 되는 지점에 자리한다.


과거의 기억에서 자유로운 사람으로 ‘기억상실자’를 떠올릴 수 있다. 기억상실자는 자신을 향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기억상실자라고 과거의 기억에서 완전하게 자유로울까? 그건 불가능하다. 몸과 마음에 새겨진 기억이 그렇다. 수영이나 테니스처럼 몸에 익힌 기억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두 발로 걷는 것도 같은 이치다. 걷고자 하는 욕구를 뇌와 신경 그리고 근육이 유기적으로 협력해야만 걸을 수 있다.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 넘어지고 일어서서 다시 걷는 과정을 수없이 거쳤다. 걷는 행위에 대한 나의 확신이 몸에 쌓여서 지금은 무의식적으로 걸을 수 있다. 낯선 회전계단을 오르고 내리는 동작에서 느껴지는 익숙함은 물론, 발소리의 메아리가 짓는 떨림도 마음의 기억으로 남는다.


물론 극한의 상황에 놓이면 몸에 새긴 기억마저 지워진다. 장시간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전환장애에 노출될 수 있다. 의학용어라 낯설게 들리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질환이다. 바로 히스테리다. 외부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적절히 풀지 못하고 한계에 부닥치면, 갑자기 걷지 못하고 앞이 보이지 않는다. 죄 없는 자신에게 스스로 총구를 돌리고 방아쇠를 당긴 격이다. 자기 자신마저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 상황에, 평생 몸에 쌓았던 신뢰는 한순간 무너진다. 산다는 건 자신에게 믿음을 짓는 일이다. 일상의 기억, 문득문득 떠오르는 상념, 몸에 새겨진 기억, 익숙한 냄새와 감각, 모두 나도 모르게 몸에 쌓는 믿음의 흔적들이다. 믿음의 존재 방식은 바로 기억이다.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세상에서 기억을 잃은 듯이 느끼기 위해서다. 내게 절실했던 무엇이 있을 텐데, 나는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 어느 날 어떤 문장에서 단서를 발견하고, 내가 놓쳤던 일을 조각조각 기억 속에 되살린다. 때로 그 기억은 전혀 다른 의미로 재구성되기도 한다. 과거는 우리 삶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친다. 해방의 길은 요원할까? 길은 하나다. 과거를 온전하게 만들고, 그 과거와 정직하게 대면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가 아니라, 과거라는 당신의 말은 옳았다. 잃어버린 무엇을 찾아 나서게 만드는 하는 힘이 있는 소설,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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