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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반수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면, 반수연 소설집 <통영>을 읽자

by 윌마

허기진 배는 밥으로 채운다. 배는 다시 허기진다. 허기진 마음이라고 다를까. 애꿎은 술잔을 기울여봐야 잠시뿐, 허기는 가시지 않는다. 허기는 까닭 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닮았다.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반복된다. 결코 벨 수 없는 허기, 그런 허기와 싸워서는 안 된다. 속수무책의 몸을 파도에 맡기듯, 일없이 달래서 면할 뿐이다. 최대한 허기를 배음(背音)으로 돌려야 한다. 배음은 대사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존재한다. 그 자체로 드러나는 일은 드물다. 마치 공기처럼.


채웠지만 곧 비워지는 것, 허기는 정해진 일이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 허기를 끝내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비슷한 성격을 띠는 것을 나는 몇 안다.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알 수 없는 심연이 그렇고, 그리는 것만 허락되는 그리움이 그렇다.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채울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식하는 순간, 마음은 더 허기진다.


허기는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 허기가 링 위에 오르면, 그건 사건이 된다. 그리움에 사무치는 밤이 그렇고,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오늘이 그렇다. 어쩌면 몇 날 며칠 허기를 달래지 못한 긴박한 순간일 것이다. 배음으로 치부했던 소리는 사이렌이 되어 전면에 등장한다. 그 소리는 서서히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내 주위를 삥 둘러싼다. 마치 안개처럼.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 쳐도 단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이 온다. 허기는 중심부를 정확히 찌르고 들어온다. 내 삶의 가장 연약한 곳이다. 안개는 마음의 허기가 삶을 집어삼키고 토해 낸 흔적이다. 삶의 책장을 넘길수록 분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안갯속을 걷는 느낌을 받는다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를 노리는 허기를 찾아야 한다. 여전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면, 반수연 소설집 <통영>을 읽자. 그 허기가 당신을 집어삼키기 전에.


『메모리얼 가든』은 자신이 안갯속에 갇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이민자 이야기다. 화자의 근무처는 화장터다. 죽음과 가까운 곳에서 자기 앞의 생(生)을 살려고 발버둥 친다. 안개 자욱한 날이면 화장터의 풍경은 더 스산하다. 안개에 갇혀 살을 태운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다. 생과 죽음의 자리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땅 위에 가라앉은 연기가 발에 밟힐 것 같아 걸음이 자주 휘청거렸다." 소멸과 죽음의 그림자를 삶의 배음으로 인식하는 순간이다.


사람의 잠재의식은 살아 있는 동안 항상 죽음을 경험한다. 그래서 우리는 생(生)에 더 집착하는지도 모른다. 실패와 부재, 즉 꿈의 파멸이라는 과정을 통해 생은 더욱 공고해진다. 죽음이라는 추락은 새로운 꿈의 밑거름이 되어 다시 생을 생동하게 한다. 이렇게 생과 죽음의 연관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죽음을 실패와 부재의 자리로 인식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안갯속에 갇히게 된다.


『사슴이 숲으로』는 한때 잘 나가는 큐레이터였던 화자가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화가의 작업실을 정리하며, 실패하는 것이 두려워 오래도록 부정해 온 ‘자신’과 다시 대면하는 이야기다. 누군가의 삶을 정리하는 일은 나 말고 그를 비극의 주인공으로 세우는 일이다. 화자는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비극을 살아낸다는 걸 깨닫는다. 그렇다면 가까운 곳에서 나를 붙들고 씨름하는 사람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화자는 안개처럼 자신을 둘러싼 마음의 허기와 맞서려고 한다. 이제 화자는 말할 수 있다. 남을 이해하려 들지 않고 자신의 틀에 갇혀 사는 사람에게 ‘그건 아니다’라고. 이제껏 자신이 그런 삶을 살았노라고. 그렇게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그동안 타인과 세상을 향해 벽을 세운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걸 잊지 말자는 다짐이다. 우리는 밖으로 말하면서 안으로 다짐한다. 사람이 짓는 모든 표현의 방향은 상대이면서 또한 자기 자신이다. 그래서일까? 이국에서 쓴 일곱 편의 단편은 이민자의 삶을 묘사하면서 동시에 작가의 고향 통영을 향해 있다. 통영은 글의 뼈와 피가 되어 지금도 작가를 키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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