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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Aug 05. 2020

깨진 창문 사이로

내 안에 억눌린 감정의 지문 찾기


논어 팔일(八佾)편에 회사후소(繪事後素)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그림은 흰 바탕을 먼저 갖춰야 채색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인간적 품성의 중요성을 그림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죠. 그림에서 바탕을 뜻하는 흰 ‘소(素)’는 회화의 평면성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미술평론가 그린버그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바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대상 재현에 몰두했던 회화 풍토를 비판했습니다. 바탕이 있어야 그림을 그릴 수 있기에 그림의 본질은 평면성에 있다는 것이죠. 회화의 평면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바탕색은 순도 높은 본질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형상이 사라진 빈 공간은 결코 공허하지 않습니다. 형상을 버림으로써 그동안 보이지 않던 그 무엇을 드러냅니다.


소통이라는 시선에서 접근하면 그림의 바탕은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만큼 마음에 준비가 되었는지를 의미합니다. 마치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시작하기 바로 전, 무대와 객석이 모두 숨을 죽이고 보이지 않는 음악을 기다리는 공간과 같은 것이죠. 음악의 현장성과 달리 그림의 바탕에는 무심히 흘려보낸 과거를 현재로 역류시켜 대면하는 시선이 담겼습니다. 그것은 경청하고 공감할 만큼 삶에 충분히 너그러워졌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대상을 그리듯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설득하는 것은 경청과 공감을 통해 상대방과 교감한 뒤에 하는 일입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내 안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물론 주위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모양입니다. 때론 결코 들어서는 안될 악마의 유혹으로 치부했습니다.


처음에는 훤히 보이는 창문이었습니다. 창문을 열면 안과 밖은 따로 구분이 없었죠. 그들은 하나였고 소통하는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안과 밖에서 색을 입혔습니다. 마치 선악과를 따먹고 부끄러움을 알게 된 이브가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벌거벗은 몸을 가린 것처럼요. 맘에 드는 색은 즐겁게 입혔고, 맘에 들지 않은 색은 힘겹게 입혔습니다. 색이 바랠 때면 다시 입혔고, 색에 지칠 때면 다른 색으로 입혔습니다. 안을 들여다볼 수 없다면 창문은 벽과 다르지 않습니다. 창문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내 안의 욕구를 전혀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욕구가 바닥난 사람에게 다가와 원하는 게 무엇이냐는 짓궂은 질문을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간절히 외칠 때는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으면서, 머리는 굳고 새로운 무엇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는 시점이 되어서야 사라져 버린 내 욕구에 관심을 갖습니다.


우리는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각을 밖으로 내어 놓고 주위로부터 다듬어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나름의 방향성을 찾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의 생각은 자주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죠. 특히 골방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은 보이지 않는 영역을 반영하지 못하기에 오류에 노출되기도 하고 개인의 상황에 따라 과장될 개연성이 있습니다. 오류가 있는 생각은 왜곡된 감정을 만듭니다. 왜곡된 감정을 감당하기 어려워지면 우리는 힘든 감정을 다스릴 다른 생각과 행동을 끌어냅니다. 심리학 용어로는 방어기제라고 하지요. 내 경우에는 감정을 억압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나를 힘들게 하는 생각을 멈추려고 노력했지만 생각하지 않을 권리는 내게 없었습니다. 다른 일에 매달려보고 머리를 흔들어보고 먼 산을 바라보면서 잊으려 했지만 좌표 없이 떠오르는 생각의 물꼬를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과정은 창문에 색을 입히는 것과 같습니다. 그 안으로 점점 희미해지는 감정을 살필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야만 한다’ ‘안 그러면 사람 구실 못한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왜 그래야만 하나요? 왜?”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다들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 당연함은 누가 정한 걸까요?”
“……”
“절대 전제라는 게 맞냐는 거죠? 이게 절대적이라면 여기에 못 미치면 괴리감이 발생하죠. 그게 나를 힘들게 하고. 그래야만 한다는 전제를 거둬내면 지금 하는 이 정도도 괜찮은 수준이거든요.”
“그렇네요. 내 생각이 내 생각이 아니네요. 그래야만 한다는 당연함을 내게 맞게 조정하는 고민을 예전에 했다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이 드네요.”
“지금 계속 생각만 말하고 있어요. 감정은 보이지가 않아요. 예를 들어 그런 고민을 미리 했더라면. 그래서 덜 버겁고 괴리감도 줄이고 내가 충분히 가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잖아요? 이런 경우에 어떤 감정이 들까요?”
“안쓰럽다?”
“화가 나지 않을까요? 억울하지 않을까요? 지금 보면 감정을 억제하고 전혀 표현을 안 해요. 답답함을 감정으로 연결 짓지 않아요.”


나는 생각은 많고 감정은 적은 사람이었습니다.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감정으로 연결 짓지 않았습니다. 파괴되어 파편화된 조각 위에 자신을 세워 놓고서 타자를 대하듯 안쓰럽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본연의 감정에는 관심을 거두고, 생각에는 생각을 더하면서 오는 불균형이 나를 힘들게 했습니다. 생각은 많고 감정은 적은 패턴은 생산적이고 효과적으로 내 삶에 기여했지만 정작 내 자신에게는 어느 선까지였습니다. 결국 내 안에 숨겨진 욕구를 찾기 위해 내 안의 나와 대화를 나눠야 했습니다. 그런데 두텁게 색이 입혀진 창문으로 내 안의 나와 소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난감했습니다. 빛은 깨진 창문 사이로 들어왔고, 다시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자주 길을 잃고 헤매었지만, 곁을 내어준 이들의 도움으로 다시 출발선에 설 수 있었습니다. 나와의 소통이 익숙해질 무렵 다른 난관을 만났습니다. 생각과 감정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어디까지가 생각이고 어디부터가 감정인지 혼란스러웠습니다. 결과적으로 나는 많은 곳에서 생각을 감정으로 착각했습니다. 심리학 책에 사례로 나오는 그 사람처럼 아픔을 향한 정규 코스를 따라갔던 모양입니다.


드라마에서 누나를 힘들게 하는 상대에게 남동생이 멱살을 잡고 싸우는 장면이 나오면 나는 좌불안석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지켜준다는 것이 내게는 낯설었습니다. 별일 아닌 장면이 내게는 별일이었습니다. 나라면 저들처럼 내 가족을 지킬 수 있을까? 저렇게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내가 실망스럽고 바보 같았습니다.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반사적으로 나를 과거 어느 지점으로 데려갔습니다. 두려움은 언제나 그곳에서 출발해서 현재로 흘러왔습니다. 나는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맹목적으로 반복하면서 생각은 스스로 무게를 더해갔습니다. 그 무게에 짓눌린 나는 누군가를 지킨다는 것을 낯선 곳에 홀로 남겨진 것만큼 힘들어했습니다. 누군가 내게 지켜 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벌어지지 않은 일을 내게 계속 들이대면서 말입니다. 바보 같다는 느낌을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었습니다. 그것도 왜곡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죠. 내 아픔 방정식은 이런 패턴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깨지지 않았다면 들여다보지 않았을 겁니다. 내 안에서 행해지는 의식 활동과 이로 인한 부산물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그로 인해 불필요한 감정 소모가 얼마나 심했는지, 내가 맺은 삶의 끈이 얼마나 약해졌는지 살피지 못했을 겁니다. 보이는 것에 매달려 살다가 내 아픔 방정식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할 때면 스스로가 민망스러웠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이 났습니다. 그 눈물은 나를 부수는 왜곡된 생각의 파편 위가 아니라, 무언가를 발견한 기쁨과 왜곡된 감정에 휘둘려 지낸 억울함이라는 단단한 감정의 바탕 위에 서 있다는 증거였습니다. 흐르는 눈물에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고개를 들면 그 날 하늘은 유난히 높고 파랬습니다. 유독 깊어 보이는 하늘은 깊숙이 보이지 않는 무엇을 담고 있는 바탕이었습니다. 구름 한 점, 바람 한 점 얻지 못한 하늘이 아니었습니다.


오늘은 비장할 만큼 깊고 파란 하늘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드러내 보이게 하려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의 하늘이 아니라 현상 너머의 보이지 않는 하늘을 알게 된다면 나는 안과 밖이 하나 된 나로 거듭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하늘만큼 커다란 바탕 위에 서 있습니다. 바탕은 나에게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묻습니다. 바탕 자신은 깨진 창문이라고 했습니다. 깨진 창문 사이로 내 안의 나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바탕 위에 점을 하나 찍습니다. 까만 바탕 위에 까만 점을, 하얀 바탕 위에 하얀 점을 찍습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점을 보이게 찍어 갑니다. 점을 찍는 일은 바탕 위에 새로운 대상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하는 너무도 많은 나를 올리는 것입니다. 화가 김기린은 '점은 시작일 수도 끝일 수도, 또한 선도 되고 형태도 되고, 그 안에는 시간도 생각도 흔적도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림에 가까이 서자 점들은 제각기 숨을 쉽니다. 닮은 듯 다른 모습의 점들은 시간과 생각과 흔적을 담은 삶의 지문입니다. 억눌러서 보이지 않았던 감정의 지문을 찾는 일입니다.
작가는 1970년대 한국 화단의 큰 흐름이었던 단색조의 모노크롬 회화를 이끌었습니다. 제목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그가 프랑스 유학 시절 영향을 받았던 현상학자 메를로 퐁티의 책 이름과 같습니다. 작가가 바탕 위에 점을 찍는 장면이 궁금합니다. '몸의 감각을 통해 직접적으로 얻는 것이 진리의 실재'라는 메를로 퐁티의 주장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현실로 역류시켜 다시 보이게 하는 행위를 몸에 체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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