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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Sep 17. 2020

어느 역에다 내려놓은 나

안는 것은 안기는 것을 포함한다


굳이 애써 찾지 않아도 됩니다. 마주치지 않고는 도저히 지나갈 수 없거든요. 테니스 코트만 한 비현실적인 크기의 캔버스가 복도 벽면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런데 이게 그림이 아니고 부드러운 카펫입니다. 그것도 따뜻한 오렌지색이네요. 어느새 공간은 오렌지색 향기로 가득합니다. 온몸의 감각이 살아나 저마다 안기고 싶다고 아우성칩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향기에 취해 카펫으로 다가갔습니다. 안겨보고 등을 기대보고 만져보고 비벼 대면서 따뜻한 품에 한동안 묻혀 있었습니다.


아침형 인간으로 거듭나면서 아이들이 일어나면 꼭 안아주었습니다. 어려서부터 해왔던 터라 아이들은 엄마만큼 키가 커서도 포옹하는 것을 불편해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포옹은 아이들을 벗어나면 작동하지 않습니다. 안고 안기는 것보다는 뭔가 끈끈하게 엮인 정에 기대어 산다고 하죠. 술 취한 척 아내를 안으려고 하면 돌아오는 건 주책맞다는 타박입니다. 소중한 사람을 저 세상으로 배웅할 때면 누군가의 품에 안겨 실컷 울고 싶지만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켰습니다. 너무 커버렸다는 착각 때문에 따뜻한 품이 필요하다는 욕구를 억누르고 사는 겁니다. 나만 희생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거라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버티는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잘하는지, 나를 위해 무엇을 찾아 주어야 하는지, 내가 누구인지 찾아본 적이 있을까요? 어느 역에다 나를 내려놓고 무작정 좋은 아빠, 좋은 엄마, 착한 사회 구성원으로 끝도 없는 길을 달리고 있습니다. 회사의 목표와 아이의 희망에는 열심이면서도 정작 자신의 희망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안아주든 안기든 따뜻한 품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살던 어느 날 아내가 영국행 비행기 표를 건네주었습니다. 직항은 비싸다며 카타르를 경유해야 한다면서요. 직접 받은 것은 아니고 진동 소리와 함께 휴대폰 메시지로 받았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행기 표를 건네는 아내가 앞에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표를 건네받은 찰나의 순간 수많은 장면이 흘러 지나갑니다. 아내는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영국에 가면 전 세계 그림을 그것도 무료로 볼 수 있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습니다. 마흔 즈음에 찾아온 사춘기에 휘둘리면서 아내에게  힘들다는 표현을 과하게 했던 무렵입니다. 아내는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신랑의 축 처진 어깨가 못내 마음에 걸렸던 모양입니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는 대신 수업을 하나 신청했습니다. 승진에 도움이 된다는 중국어 강좌가 아닌 그림 수업이었습니다. 내가 출근하고 나면 아내는 그림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식탁에 멍하니 앉아 있던 남편을 프레임 없는 틀에 담아 찬찬히 바라봤던 겁니다. 아내의 생각은 그림 너머에 있을 텐데요. 답을 아내에게 기대할 수 없습니다. 바로 내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영국에 도착하기 전까지 참 답답했습니다. 여행 목적이 분명치 않았거든요. 혼란스러웠습니다. 누구를 만나러 왔는지, 무엇을 찾으러 왔는지 아니면 내 안의 불안을 비우고 자존감을 채우러 왔는지 생각만 맴돌 뿐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목적지를 찾지 못한 나는 버스에서 언제 내려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거리는 아이였습니다. 분명 아내는 나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을 텐데요. 보통 그렇지 않나요? 내 의지가 아니라 등 떠밀려 왔다는 생각을 하면 일이 잘 안 풀립니다. 이 여행 뭐지? 하는 회의감마저 들었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생각하지 말자고, 꼭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다독였습니다. 시간이 답을 주겠지 싶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그게 답이었습니다. 발도 떼지 않은 여행에서 결론부터 찾고 있으니 답이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여행에서 여러 개 답을 찾았습니다. 그 답 중 하나를 테이트모던(Tate Modern Collection)에서 만났습니다. 오렌지색 카펫 월(Carpet Wall)을 통해 누군가의 품에 안기고 싶어 하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아이들을 안아주고 아내를 안아주고 아픈 엄마를 안아주는 나도 있지만, 나 역시 누군가의 품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신호였습니다. 내 안에 욕구들이 스스로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희망을 쏘아 올린 신호탄이었죠. 안아주는 환경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좌절한 순간에 그 가치가 빛납니다. 평소 공감해주고 안아주는 환경 속에서 안정감을 얻은 경우에는 좌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안아주는 환경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대부분 극심한 공포와 분노를 느낍니다.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캇은 안아주는 환경(holding environment)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습니다. 정서를 안정시키고 자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환경으로 따뜻하게 안아주는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재미를 위한 편의시설 정도로 생각했는데 오렌지색 카펫 월은 분명 그 이상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출신 개념주의 작가인 루돌프 스팅겔(Rudolf Stingel, 1956~ )이 1993년에 제작했습니다. 작가는 관객의 시선과 참여가 작품을 완성하고 새롭게 태어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객과 소통하는 작품에 관심이 많습니다. 카펫 월은 애써 찾지 않아도 만날 수 있도록 캔버스를 벽면으로, 그림을 카펫으로 대체해서 관객과의 거리를 없앴습니다. 잠깐 동안 떨어져서 지켜봤는데 다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카펫 위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등을 기대고 팔을 쭉 펴서 날개 짓을 했습니다. 나는 천사라고 말없이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작품에서 돌아서는 관객들의 표정은 즐거움으로 가득했습니다. 덕분에 테이트모던의 난해한 현대미술을 수월하게 감상할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따뜻하게 품어주라고 말해준 작품입니다. 관객들 모두가 예술가라며 예술의 권위를 낮춰준 작가입니다. 낮은 곳으로 흘러 만남을 이야기하는 예술가, 테이트모던에서 만난 루돌프 스팅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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