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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Sep 18. 2020

모순

하나이면서 둘인 쌍둥이처럼 극에서 극으로 연결되는 역설


유학을 마치고 조명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는 친구 이야기입니다. 국내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분야를 배울 수 없다며 비행기에 몸을 실을 만큼 자기 색깔이 분명한 친구입니다. 친구는 새침한 척 하지만 잠시만 같이 있으면 소탈을 넘어 털털한 성격을 숨기지 못합니다. 조명 컨설팅은 특성상 현장 근무가 잦습니다. 사무실과 현장을 오가며 설계한 디자인이 마지막으로 연출되기까지 조명 선정부터 인테리어 전반을 총괄하는 역할입니다.


건설현장을 누비던 친구는 여자가 겪는 낯선 어려움을 종종 토로했습니다. 먼지 자욱하고 위험이 도사린 현장에서 안전모를 쓰고 늦은 시간까지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을 친구를 생각하니 많이 안쓰러웠습니다. 그런데 친구에게는 이런 극한 환경을 이겨내는 동기가 있었습니다. 조명에 불이 들어오는 순간 실내를 채운 불빛 알갱이들이 날갯짓을 시작하면 날갯짓은 하나의 바람이 되어 자신을 감싸옵니다. 그 바람에 안겨 자신의 상상이 현실이 되고, 그 순간 피부 세포 하나하나가 빛과 연결되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전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인 것이죠. 조명을 통해 자신의 진실을 알아버린 친구는 이상하게 바로 절망했다고 했습니다. 연꽃이 뿌리를 내린 곳은 진흙입니다. 친구는 바라지 않았지만 자신이 어쩔 수 없는 현장 질이라는 사실에 마냥 좋아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을 현장이라는 거친 상자에 가두는 것이니 말입니다.


친구가 발견한 진실은 되려 자신의 가슴을 뻥 뚫리게 하는 절망이기도 했습니다. 친구는 내게 그 상황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실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이해하기 힘든 모순의 상황을 낯설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한동안 조명 컨설팅 경력을 이어가던 친구는 운명의 개입으로 모순 같은 상황에서 벗어났습니다. 우연히 다른 분야로 자리를 옮긴 것이죠. 그 친구는 새로 옮긴 분야에서도 자신의 진실이 담긴 상자를 열고 희망과 절망을 같이 경험할 겁니다.


삶의 진실은 모순이라는 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는 외줄타기였습니다. 자신을 밟고 서 있는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쪽저쪽으로 흔들리게 하는 질긴 생물. 이쪽을 선택해도 결국 저쪽을 만나고, 저쪽이 무서워 이쪽을 멈추면 결국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 빠지는 것이죠. 떨림이 멈춘 정지의 순간은 어쩌면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입니다. 모순을 만나면 당혹스럽습니다. 실은 더 열심히 당혹스러워해야 했습니다. 몇 번 힘든 모순의 상황을 거치고 나면 젊은 날의 사랑과 증오 같은 풍부했던 내 안의 감정을 몽땅 지워버리고 기계처럼 살게 됩니다. 우연과 필연이 섞인 삶의 왜곡은 불필요한 감정을 소모하게 하고 스스로를 아프게 합니다. 내 편과 네 편, 밝음과 어둠, 당근과 채찍, 창과 방패 이렇게 세상을 절반으로 나누고 내 입맛에 맞는 쪽을 편애하는 것이 일상의 내가 했던 일입니다. 발버둥 치면서 벗어나려 했던 사람은 사실 가장 의존했던 사람입니다.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은 직장은 눈보라를 피하게 해 준 우산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위에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나를 달리게 하는 동력이었습니다. 욕구를 동력 삼아 나는 희망을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희망을 투사해 쌓아 올린 탑은 되려 나를 삶의 무게에 짓눌리게 했습니다. 누군가 의도된 연출이 아닐 의심해보지만 연꽃과 진흙에는 아무런 타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창과 방패 사이의 연결고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에게 편한 쪽을 선택해 걷다 보면 그 끝은 내가 눈길도 주지 않았던 불편한 쪽의 시작입니다. 모순의 상황은 인간이 숙명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양날의 모습을 하나의 자신 안에 통합하는 연습 무대였습니다. 외줄 위에서 허락된 선택은 뿌리 깊고 철갑을 두른 나무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감내할 수 있는 흔들림의 무게를 확인하고 살아가면서 지지대를 튼튼히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인생의 국면은 바뀌어도 모순이라는 외줄타기는 계속됩니다. 우리가 삶의 진실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한눈에 반하는 상대가 있다는 건 분명하지만 그 사람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스쳐 지난 만남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동할 때가 있습니다. 다음 날 다시 생각나고 그다음 날 또 생각납니다. 은근함이 끈질기게 이어질 때 우리는 묘한 매력이 있다고 말하죠. 내 안에서 끊임없이 논란을 일으키면서 매력은 배가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묘한 매력이 느껴지는 그림을 만나면 한동안 그 분위기에서 헤어나기 어렵습니다.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가 그린 <마리아나>는 묘한 매력을 풍기는 바로 그 작품입니다. 마리아나는 성당 뒤편에 창문을 열면 바로 낙엽수가 보이는 작은 방에 서 있습니다. 푸른색 벨벳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우아하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바로 애처로운 감정이 듭니다. 그제야 탁자와 바닥에 나뒹구는 낙엽이 눈에 들어옵니다. 결혼에 필요한 지참금을 잃어버리고 정혼자에게 버림받은 마리아나는 젊음마저 늦가을을 맞았습니다. 고개를 뒤로 젖힌 옆모습은 가느다란 허리만큼이나 관능적이지만 동정녀 마리아를 연상시키는 성스러움이 같이 느껴집니다. 죽은 그리스도 옆에서 통곡하던 성모 마리아는 늘 푸른색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창문에 그려진 그림은 아이의 잉태를 알리는 대천사 가브리엘과 마리아입니다. 바로 수태고지 장면입니다. 처럼 하나의 인물이 극에서 극으로 연결되는 역설은 오히려 스펙트럼을 넓혀 다양한 상징을 가능하게 해 줍니다. 여자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장치가 그림에 숨어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자에는 자로>의 여주인공 마리아나는 밀레이의 그림을 통해 현재의 내게로 걸어옵니다.


마리아나는 내가 알던 여성이라는 이미지 너머에 존재했습니다. 성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우주입니다. 모든 인간은 성에서 비롯되었고 성의 중심에는 여성이 자리합니다. 상품이라는 수단으로 전락한 여성이  아닌,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은, 그래서 자연이 인격화 된 모습으로써 여성이라는 존재에 눈을 뜨게 합니다. 나는 마리아나를 꼬옥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아니 꼬옥 안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순수와 관능,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에 익숙한 내 시선 안에서 마리아나는 허망하게 사라집니다. 결코 하나로 엮이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을 온전히 하나의 자신에 간직한 마리아나는 지금 내가 생각하는 행복과 불행, 선과 악, 밝음과 어둠이라는 구분 역시 모순이라는 인생 무대를 제대로 겪어내지 못하고, 자신의 진실을 너무 쉽게 세상과 타협해 버린 내 안의 왜곡 탓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내가 나를 바라보는 차별의 시선이기도 했습니다. 여성은 평등한 인간이자 모습만 다른 남성의 또 다른 이름이지요. 하나이면서 둘인 쌍둥이처럼 극에서 극으로 연결되는 역설이자 영원한 동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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