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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Sep 19. 2020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내밀한 욕망과 통절한 자기부정 사이에서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습니다’
‘나는 다시 태어났습니다’
나는 지금 ‘하고 싶다’와 ‘했다’ 사이에 서 있습니다. 접속사를 사이에 두고 이웃처럼 가까운 사이인가 했더니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거리입니다. 원하는 곳까지 도착하기 위해서는 방향과 동력이 필요하지요. 둘 중에 하나라도 틀어진다면 이름 모를 땅에 떨어져 흔적을 찾기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가고 싶다고 해서 모두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길의 끝에서 거듭난 자신을 바라보는 건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지요. 자신이 쌓은 성이 견고할수록 과거와의 단절은 어렵습니다. 한사코 버려야 갈 수 있는 길 앞에서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망설임의 시간만 쌓여갑니다. 모순이라는 외줄타기가 인간의 숙명이라면, 의 괘도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싶다’라는 존재의 내밀한 욕망을 동력으로 삼고, ‘했다’라는 통절한 자기부정을 방향으로 삼아 아슬아슬 줄 위에서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이렇게 영겁 같은 간극을 뛰어넘어야 먹물 같은 어둠을 걷어낼 수 있을 텐데요. 빛이 어둠에게 내어준 자리라면 내일의 태양을 기다리면 됩니다. 하지만 내 마음속 그림자라면 스스로 그림자를 대면하고 빛을 찾아야 합니다.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은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 자신에게 중요한 변곡점이 된 작품입니다. 고갱은 인상파 화가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을 무렵 그림을 시작했습니다. 동료 화가들의 조언에 따라 인상주의 기법을 시도했지만 시선은 자꾸 다른 곳을 향했습니다. 토속적인 토기류와 일본 판화처럼 원시적인 삶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색다른 시선은 과거와 다른 시도를 끌어냈습니다. 인상파풍의 빛과 색채 표현에서 벗어나 차차 특유의 독창적이고 장식적인 화풍을 정립해 갔습니다. 인상파도 초기에는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변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었죠. 고갱은 두렵지만 다시 변방에 서려고 합니다. 자연을 미화하거나 재현하는 그림을 멀리 했습니다. 강렬한 색채와 자유로운 형태는 고갱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상을 단순화하고 재해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덕분에 인상파와는 차별화된 작품세계를 펼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과정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고갱은 대중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보다 동료 화가들의 인정을 바랐습니다. 전업 화가로 변신을 반기지 않았던 동료들은 그를 수집가 출신의 아마추어 화가로 치부했죠. 고갱은 자신만의 예술적 창조성을 인정받고 진정한 화가로 다시 태어나고 싶었습니다. ‘하고 싶다’와 ‘했다’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고갱의 선택은 다름 아닌 야곱이었습니다.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은 구약성서의 첫 권인 창세기에 나오는 일화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사랑을 받고 있던 형 에서를 속여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양수받고 아버지에게 축복까지 받아냅니다. 태어날 때도 에서의 발목을 잡고 세상에 나온 야곱입니다. 에서의 보복이 두려운 야곱은 20년간 외지를 떠도는 나그네 생활을 합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는 둘째 딸 라헬을 얻기 위해 7년간 보수 없이 일을 합니다. 그런데 막상 첫날밤 신부로 첫째 딸 레아를 맞고서 외삼촌에게 따져 묻습니다. 맏딸을 먼저 출가시키는 관례를 따랐다는 외삼촌의 꾀에 넘어간 것이죠. 교활했던 야곱은 꾀부리지 않고 7년을 더 일해서 라헬과 결혼합니다. 자신의 그릇된 행동에서 비롯되었을 대가를 묵묵히 받아들였던 야곱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자신 안의 진실을 발견합니다. 이제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야곱에게는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아 있습니다. 바로 형 에서입니다. 야곱은 에서가 자신은 물론 자신의 가족까지 죽일까 두렵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에서를 통해 거짓을 일삼았던 자신의 그림자와 대면하는 일입니다. 내면의 거짓을 거둬내고 진실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그림자는 생각보다 두텁고 두렵습니다. 야곱은 종들을 보내 먼저 에서에게 은혜를 구합니다. 하지만 에서는 지난날의 치욕을 곱씹으며 군사를 몰아 야곱을 향해 달려옵니다. 에서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예물과 가축들을 여러 갈래로 나누어 보냅니다. 심지어 자녀들과 아내들까지 보냅니다. 모든 것을 떠나보낸 뒤 야곱은 홀로 남았습니다.


야곱은 혼자가 되어 막다른 골목에 서 있습니다. 그때 천사가 나타나 야곱에게 씨름을 제안합니다. 야곱은 날이 새도록 천사와 씨름을 합니다. 지친 천사의 허리춤을 놓지 않고 끝까지 물고 늘어집니다. 천사는 자기가 야곱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어긋나게 합니다. 아파서 숨을 쉬기도 힘들지만 야곱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간절합니다. 사기꾼의 삶이 아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서 축복받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에는 야곱의 실존적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야곱이 보여준 변화의 열망에 천사는 축복을 내립니다. 사기꾼을 뜻하는 야곱이라는 이름을 ‘오직 하나님만이 그를 다스린다’라는 뜻에 이스라엘로 바꿔줍니다. 새로운 정체성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의 상징이 바로 야곱입니다.


고갱은 변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되고자 하는 자신의 다짐을 야곱이 되어 상상합니다. 그 상징적 장면을 무채색의 현실과 대비되는 붉은색 초록색 주황색으로 표현했습니다. 투박해 보이는 색채지만 화가로서의 새 출발을 다짐하는 고갱의 진득함이 배여 오히려 강렬한 메시지를 줍니다. 아무리 상상의 세계라지만 그 넓은 들판을 황량한 현실을 상징하듯 붉게 그릴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사실주의와 인상주의에서 벗어나 진정한 상징주의에 도달한 첫 작품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회화는 고갱을 만나서 자연을 재현하고 지식을 표현하는 도구라는 틀에서 벗어나 자연에 대한 화가의 감정과 상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인생 수업>의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bler-Ross, 1926~2004) 박사에 따르면 우리는 부정, 분노, 타협, 절망, 수용이라는 다섯 단계를 거치면서 슬픔을 받아들입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자신에게 찾아온 불행에 분노합니다. 괜찮을 거라고 타협해 보지만 슬픔은 현실이 되고 우리는 절망합니다. 여기에 치명적 질병은 사람의 정체성을 나락으로 끌어내립니다. 과정에서 겪는 고통의 농도는 짙어집니다. 그렇게 절망의 터널을 힘겹게 빠져나오면서 현실을 온전히 수용하게 되는 것이죠. 그 순간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힘든 상황을 부정하고 분노하고 타협하고 절망하고 수용하는 일련의 행위는 아픔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내면의 길을 찾는 과정입니다. 다섯 단계의 시작과 끝은 누군가의 허리춤을 붙들고 씨름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굳게 걸어 잠근 마음의 문에 부딪혀 천사가 밖에서 씨름하자고 조르는 소리는 허공으로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의 허리춤을 붙들고 씨름을 했던 걸까요?


사람들은 생사의 갈림길에 서면 자신에게 씨름을 제안하는 존재를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옵니다. 그런데 승리하는 건 늘 죽음이죠. 죽음과 싸우려고 하면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죽음이라는 두 글자에 얽매여 씨름하는 형국이라면 죽음 앞에서 생동하는 삶은 요원합니다. 반복되고 재생산되는 부단한 과정에서 자기 폐쇄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 일상입니다. 갇힌 일상을 생동하게 하는 일이란 자신 안의 부정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인정하고 개선하는 과정니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에 매달리면서 스스로를 자책하는 시간에 갇혀 사는 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실체가 없는 일상의 불안을 붙들고 씨름을 하는 이죠.


무감어수 감어인(武監於水 監於人). 자신을 거울에 비추는 것은 표면에만 천착하게 합니다. 야곱은 에서라는 관계망에 자신을 비추면서 일상에서 보지 못했던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려운 마음에 다시 현실을 외면하고픈 충동이 커져갑니다. 야곱은 실존적 자신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 천사의 허리춤을 놓지 않았던 겁니다.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을 보면서 거짓을 버리고 축복받는 삶을 위해 씨름하던 야곱을 생각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작품세계를 위해 순수의 땅 남태평양 작은 섬으로 향하던 고갱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모두 씨름을 하자고 조르는 천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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