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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Mar 19. 2022

과학혁명 (유럽의 지식과 야망), 피터 디어

주체와 관계가 분절된 대상은 스스로 의미를 기진 무엇이 될 수 없다


‘왜 사냐건 웃지요’

김상용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불확실하고 위험천만한 삶의 고비를 곱이 곱이 넘고서 어느덧 뒤안길에 서서 무심히 던지는 선문답입니다. 상황을 보다 정확히 설명하고자 할 때 우리는 육하원칙을 떠올립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이렇게 여섯 가지죠. 우리네 삶이란 괘도에서 이탈하지 않기 위해 한쪽에는 ‘무엇을’이라는 동력을, 다른 쪽에는 ‘어떻게’라는 방향을 양손에 잡고서 아슬아슬 줄 위를 걷는 과정의 연속이지요. 그렇다면 인간의 숙명 같은 외줄 타기는 도대체 ‘왜’ 하는 것일까요? 소설 <공터에서>의 관점을 빌리면 맨 처음 뭍에 올라온 물고기처럼 쉴 새 없이 아가미를 벌컥거리다가 죽고 또 죽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 반복에서 아가미는 결국 허파라는 차이를 만들어냈죠. 여기서 소설가 김훈은 그 차이를 만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습니다. 아마 대답 대신에 희미한 웃음을 짓지 않았을까요?


'왜 사냐?'는 물음에는 답이 없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는 정답이 없을 뿐입니다. 우리는 각자 정체성이 다르기에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답이 없는 '왜?'냐는 물음 대신 나름에 답을 구할 수 있는 '어떻게?'에 매달려 사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면 주위에서 부여해 준 의미에 기대에 살아야 합니다. 스스로 세웠다고 믿고 싶은 정체성마저도 부여받은 의미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자연과 인간 세계’를 이루는 삶의 의미나 가치를 어디에 부여하는지에 따른 세계관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보고 이해하는지를 좌우합니다. 고대 세계관은 자연을 스스로 생동하는 어떤 유기적 전체로 이해했습니다. 신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세계를 창조했기에 자연의 생동은 선(善)을 목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죠. 목적론적 세계관의 중심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습니다. 중세 유럽은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교회와 로마로 대변되는 제국 중심의 세계관이 지배했습니다. 중세 유럽을 대표하는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철학을 ‘신학의 시녀’로 간주했지요. 개인은 창조성을 가진 시민이 아니라 봉건 제도를 떠받드는 수단으로 취급되었습니다. 14세기 후반부터 인문을 중시한 르네상스 문화 운동을 시작으로 중세는 막을 내리고, 16세기 개인의 자율적 내면성에 기초한 윤리관을 강조했던 종교개혁과 17세기 과학적 자연관을 수립한 과학혁명,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으로 대변되는 민주주의적 입법 체계 수용과 그에 기초한 민주주의 정치관, 마지막으로 전 세계적인 상업활동이 활발해지고 이와 맞물려 자본주의적 경제의 초석이 되었던 18세기 산업혁명을 통해 근대는 확고히 자리를 잡습니다.


고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중세 스콜라철학에서는 자연세계에 대한 이해와 설명을 중시했습니다. 자연 자체를 탐험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16세기 근대의 초입에서 자연은 이해되어야 할 뿐 아니라 예측되고 통제되어야 하며, 자연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자연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습니다. 실제적인 문제들의 중요성과 가치를 강조하는 주장들이 빈번하게 제기되었고, 항해와 토지 측량에 사용되는 수학적 기법들과 연금술 등에 큰 관심이 모여졌습니다. 귀납법의 대가인 프란시스 베이컨은 인류의 복지를 위해 신이 선물로 주신 자연에 대한 인간의 권리를 되찾자고 했습니다. 과학의 진정하고 적법한 목적을 인간의 삶에 새로운 발견들과 자원들을 제공해 주는 데서 찾았습니다. 진리와 유용성은 동일하다는 논리 앞에 자연은 쓸모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자연은 새롭게 정의되어야 했고 자연 그 자체를 충분히 담아내는 세계관이 필요했습니다. 그 정점에서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선언했죠. 모든 것이 부정되어도 전혀 의심할 수 없는 단 한 가지, 바로 그 자신의 존재만이 인식의 주체라는 것입니다. 체계적 의심의 방법을 물체에 적용한다면 마지막에 남는 본질은 무엇일까요? 물체를 떠올려보면 색, 온도, 모양, 냄새처럼 감각적 특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물체에 대한 생각은 그것이 특정 '공간을 점유'한다는 관념 없이는 불가능하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물질은 갖가지 감각을 일으키는 고유의 속성을 가진 것인데 비해, 데카르트에게 물체의 본성으로서 유일하게 참인 관념은 기하학적 외연이었습니다. 오직 공간의 일부를 채우고 있다는 것만으로 인식되는 어떤 것입니다. 물질 자체는 고요하고 아무런 냄새도 없고 어떤 맛도 없는 무색인 것이었죠. 외연을 제외한 나머지 물체의 성질은 인간의 이성을 통해 파악된다고 보았습니다. 빛에 대한 우리 감각은 우리  눈에 어떤 움직임들이 만들어지고 진짜 원인이 되는 매개물과는 무관하게 정신이 그 움직임을 경험함으로써 생기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드디어 색깔 같은 성질 자체는 우리 정신 속에 존재하는 것이 되었습니다.(물질 영혼 이원론)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우주가 수학적 크기로만 묘사될 수 있는 미세한 물질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관찰된 모든 자연현상에 대한 인과적 설명은 물질들의 운동에 의해 일어난다는 기계론적 세계관을 수립했습니다. 기계적 세계관은 탐구의 대상이 된 자연을 효과적으로 분석해서 설명할 수 있었고, 데카르트의 기계적 세계관을 한껏 들어마신 뉴턴도 자연현상의 기본을 운동으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운동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는 데카르트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입자의 운동에 수학적 성격을 합친 '힘'이라는 개념을 가져와 운동을 정량화했습니다. 맥스웰은 물리적 실재를 점(point)들의 이합집산에서 찾았던 과거에서 더 나아가 연속적인 장(field)이라는 개념을 발견했지요. 그다음은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의 발견으로 이어집니다.


신대륙 발견처럼 주로 지리의 영역에서 사용되던 “발견”이라는 용어는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현미경과 망원경을 통해 그동안 접근하지 못했던 작은 세상과 광활한 우주에서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었습니다. 가톨릭 교회를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했던 성서를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로 직접 읽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 종교 개혁은 신과 직접 소통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외부에서 손에 쥐어주는 가르침이 아니라 직접 대면하여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내면의 발견이었죠. 17세기 이후 학자라면 '발견'을 해야 한다는 관점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자연을 대하는 철학이 사상적으로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발견은 이전에 몰랐던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발견은 지식의 파편들을 모아서 하나의 체계, 말하자면 효과적인 이용을 가능하게 해 줄 지식의 공동 보관소라는 의미로서의 체계를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발견은 과학적인 문제들과 깊은 연관을 맺은 채로 진행되었습니다. 발명이 아닌 발견은 내심 그 안에 겸손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만, 발견이 끌어올 다음의 이야기들은 겸손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발견의 결과는 인류의 행복 증진에 기여하기도 하지만, 원자폭탄처럼 전쟁의 무서운 수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오늘도 세분화되고 전문화된 과학분야에서 새로운 발견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베이컨이 말한 대로 자연을 추궁해서 얻은 결과들이죠. '결과'는 인간에게 어떤 말도 해 주지 않으며 어떤 가치도 내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결과를 해석하고 의미를 발견해서 내린 '결론'이 중요합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처음부터 괴물을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개체 발생과 생명의 원인’을 발견하고 난 이후였습니다.


현대 문명과 과학은 나누고 분석해서 인과를 논하는 기계론적인 사고방식에 많은 부분 의지하고 있습니다. 나누면 전혀 다른 본질로 변화된 결과를 얻게 됩니다. 유용한 면도 없진 않겠지만, 전체를 부분으로 환원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변한 결과도 새로운 발견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떻게?'를 극단적으로 밀어 부친 것입니다. 사실 발견한 결과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주체와 관계가 분절된 대상은 스스로 의미를 가진 무엇이 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과학은 용도를 정확히 알고 사용하기 위해 알아내는 발견보다, 알고 난 이후에 다양한 분야와 융합해서 새로운 서사를 찾는다고 합니다. 과학의 인문학이라는 컨버전스죠. <과학혁명>의 저자 피터 디어는 '어떻게의 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이제 '왜의 문제를 이해하는 것'만큼 중요해졌다고 했습니다. '어떻게?'가 중요해질수록 쏟아져 나오는 결과들에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지혜로운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허탈한 미소만 남기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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