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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Aug 24. 2022

우리의 공감능력은 진화했을까?

우리는 모두 다 서로의 거울이다

울트라 소셜(초사회성), 장대익

공감의 진화, 로버트 온스타인, 폴 에얼릭

지구온난화, 인종차별, 소득불평등, 낙태 찬반. 이렇게 인류가 직면한 다양한 사회 문제의 원인으로 전문가들은 입을 맞추어 공감의 부재를 지적한다. 사람들을 우리와 타인으로 나누고 울타리 너머의 타인은 한 배를 탄 사람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인류는 역사를 통해 공감 능력을 진화시켜 왔다. 우리는 남이 하는 행동을 보기만 해도 내가 직접 그 행동을 할 때 뇌에서 벌어지는 것과 똑같은 일을 자동으로 경험한다. 결정적인 찬스를 날린 선수가 머리를 쥐어뜯을 때 동시에 거리의 응원단도 머리를 쥐어뜯는다.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 내가 고통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런 공감 능력은 타인을 직접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가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뇌에는 거울 반응이 일어난다.


우리의 공감 능력은 자동 공감 장치는 물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추론해 공감할 만큼 진화했다. 자동으로 공감 회로가 켜지는 정서적 공감은 포유류와 영장류의 다른 종들도 가진 특성이지만, 추론 능력에서 비롯한 인지적 공감은 인간만이 지닌 특성으로 인간 사회성의 독특한 측면이다. 특히 이야기를 만들고 나누고 이해하는 언어는 추론을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하였고 결과적으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질서를 만들어 냈다. 공동의 목표를 지향하는 협력 체계로 국가와 화폐 그리고 종교가 대표적이다. 힘의 적법한 사용을 독점하는 국가의 출현은 선제적 공격의 유혹을 줄이고, 개인적 복수의 충동을 억제해서 사회의 안정을 유지한다. 화폐로 활성화된 상업은 교역할 상대가 더 많이 살았을 때 가치가 커지는 포지티브섬 게임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이제 얼굴 없는 생산, 얼굴 없는 소비, 그렇게 상품교환의 관계가 일반화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감시자이자 심판자가 존재한다는 종교적 믿음은 도덕을 가능하게 했고 사회를 키우고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런 새로운 질서가 자리잡도록 동력을 제공한 것이 과학 혁명이다. 과학 혁명은 고독한 천재의 작품이 아니라 수많은 집단지성이 협력한 사회성이 낳은 산물이다.


인류는 사회성 덕분에 가장 크고 복잡한 사회 네트워크를 지닌 강력한 종으로 진화했다. 하지만 우리의 사회성은 완벽하지 않다. 생물학적 제약과 심리적 편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신뢰 호르몬으로 불리는 옥시토신은 내집단 편애와 외집단 폄훼를 강화한다는 것이 실험으로 밝혀졌다. 이성으로 무장한 인간이 일개 화학물질에 의해 특정 사회적 행동을 미묘하게 조절 당할 수 있다는 말 아닌가. 심리적 편향은 사회성이 가진 야누스적 얼굴이다. 차별, 집단 따돌림, 편견, 불평등처럼 유구한 시간 동안 생존에 도움이 되었던 습성이 개인과 집단의 무의식 속에 새겨져 있다. 이런 심리적 편향도 사회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회성의 어두운 면은 호시탐탐 인류를 이름 모를 곳에 난파시키려고 한다. 더욱이 21세기 호모 사피엔스는 자연선택의 법칙을 깨고 인공지능처럼 ‘지적 설계’를 통해 스스로 한계를 초월한 종으로 새로운 진화를 준비 중이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는 인류에게 건강한 미래가 보장될까?


인간의 공감 능력은 반려 동식물을 넘어 정서를 나눈 로봇에까지 동심원을 넓히는 중이다. 공감 능력은 이렇게 진화하는데 우리는 타인을 규정하고 지워버리는 공감 부재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모순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공감 능력의 탄력성은 혈연, 우정, 유사성, 귀여움에 따라 제한된다. 공감 능력이 공정성의 원칙과 충돌할 때는 사람들의 안녕을 해칠 수 있다. 큰 병에 걸린 친구의 아들에 감정이입을 하면, 친구 아들보다 오래 기다렸고 어쩌면 더 아플 수도 있는 다른 아이들을 제치고서 친구 아들에게 병실을 내줄 것이다. 정치 지도자가 특정 인맥에게만 특권을 나눠 준다면 사회는 큰 피해를 입는다. 공정의 가치를 지키면서 공감의 탄력성을 키워 실제적으로 작용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어린이 사망사고 소식을 들으면 누구나 마음이 아프고 무겁다. 운전자들은 어린이 보호구역에서는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공감하지만 생각과 행동이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2019년 9월 충남 아산의 한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김민식 어린이 사고 이후에 '민식이법'이 발의되었다. 이 법은 어린이 보호구역에서 모든 어린이를 제 자식처럼 돌보자는 것으로, 공감능력의 탄력성을 확대하는데 도움을 준다. 심리학자 스티븐 핑거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감정이입에 얽어매는 내재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책과 규범의 단계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정책과 규범이 제2의 본성이 되어, 감정 이입이 아예 필요하지 않은 수준까지 올라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공감 능력의 제한성을 극복하고 날아올라 정책과 규범이라는 제2의 도덕적 본능에 안착할 때까지 공감의 진화를 이끌어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왜곡된 생각들의 정체를 폭로해서 폭력의 논거를 약화시키고, 기본적인 본능을 억누르고 좀 더 정당성이 있는 다른 동기를 따르도록 자아를 통제해서 결국 공감능력이 도덕에 이를 수 있는 수단. 딱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바로 이성이다. 우리에게 감정 이입의 범위를 넓힐 기술을 알려주는 것은 이성이고, 가엾은 타인에 대한 연민을 어떻게 정책적 행동으로 바꿀지 알려 주는 것도 이성이다. 이성은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하나의 정신 범주로 추상화한 뒤에 그것을 이겨야 할 경쟁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문제로 해석한다. 예를 들어, 전쟁을 하늘의 뜻으로 돌리면 하찮은 인간들이 현실적으로 전쟁을 줄일 기회는 거의 사라진다. 전쟁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관점은 전쟁을 구체적인 개체로 파악하기는 하지만, 침략군이 목전에 왔을 때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별 지침을 주지 못한다. 근대에 이르러 그로티우스, 홉스, 칸트, 기타 근대 사상가들은 전쟁을 지적으로 추상화하여 게임 이론의 문제라고 보았고, 제도를 조정하여 예방해야 할 숙제로 보았다. 덕분에 인류는 감정이입에 만족하지 않고 인권이라는 제도를 통해 공감의 범위를 넓히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이루기 위해, 더욱이 공정성까지 고려하면서 우리가 선택한 사고방식은 타고난 도덕 감각이 아니라 바로 이성이다. 더군다나 과거의 추론에서 결함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현재에 맞게 개선하는 것도 늘 이성의 몫이다. ‘자기부정’이라는 반성과 재인식 과정까지 학습한 이성은 현재도 거침없이 질주 중이다. 영국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이성 자체는 목적에 대한 수단일 뿐이고, 그 목적은 그 사람에 열정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열정이 향하는 방향이 우리 사회의 보편적 가치와 맞는지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성에는 ‘선과 악‘ 같은 타의가 없다. 모든 가치에 열려 있기에 확장을 선호한다. 확장에 내포된 발전과 개선이라는 개념이 꼭 좋은 뜻으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사회화‘라는 명분 아래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훈육이 그렇다. 이성적 설득이라는 탈을 썼을 뿐 아이에게는 좌절일 수밖에 없다. 이성으로 무장한 위정자들은 소외받는 저소득층 주민들을 풀어야 할 숙제로 대상화한다. 해법으로 두터운 복지와 교육 확대 같은 정책을 강화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무너지는 기반은 그대로 둔 채,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고 동아줄을 내려주는 형국은 정작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기는커녕, 오히려 주민들을 굴욕과 분노의 수렁으로 몰아갔다. 이성에 취한 사회가 보여주는 공감의 한 모습이다. 주민들이 원하는 것은 썩어 문드러져가는 자신들의 속내를 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필요하다면 침팬지의 ' 고르기' 방식으로라도 그들의 마음을 이해해야만 구성원 간의 사회적 유대를 지켜낼 수 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장착한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세 살 아이도 옆에 친구가 울면 손에 쥔 사탕을 건네준다. 사회적 시스템으로 뒷받침해 주는 것은 그다음의 일이다.


공존의 지혜는 늘 우리 가까이 있다.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다양성을 키우는 것이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는 심장병이 악화되어 더 이상 목수 일을 할 수 없는 다니엘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다니엘은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찾아간 관공서에서 복잡하고 관료적인 절차 때문에 번번이 좌절한다. 다니엘은 두 아이를 혼자 키우는 케이티를 만나 서로에게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 준다. 비극으로 끝나는 영화는 고도화되고 분업화된 사회에서 아픔이 어떻게 대상화되어 분석되고 차갑게 처리되는지를 보여준다. 성적순으로 줄 세우는 교육 환경과 천편일률적인 아파트 문화는 사회의 다양성을 정체시키는 외부 환경이다. 한국사회에 만연한 과도한 타인 의식과 물질주의는 심각한 내부 문제다. 동일한 경험이 반복되고 하나로 수렴되는 사고를 강요하는 획일성은 창의성 없는 사회를 만든다. 창의적 상상은 추론에서 비롯되고, 경험은 그 상상력의 증폭제 또는 감쇄제 역할을 한다. 햇볕이 들지 않는 반지하의 쾌쾌한 냄새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공감의 깊이는 다를 것이다. 소외 빈곤층, 동성애자. 다문화가정처럼 다양성을 바라보는 이해 지수가 낮아질수록 인간에게 내재된 공감 능력은 떨어지고 관계는 더욱 황폐해진다.


잊지 말자.

우리 인류는 뼛속까지 사회적 동물이다.

우리는 모두 다 서로의 거울이다.


#공감의진화 #울트라소셜 #우리본성의선한천사 #사피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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