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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Sep 14. 2022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혼돈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소설이지만 사회과학 철학 등 곱씹을 내용많아 요약과 소감으로 정리했습니다. 스포 주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룰루 밀러의 데뷔작입니다. 상실과 사랑 안에 숨은 절망과 희망의 상관관계를 찾아가는 동안, 우리는 ‘진실한 관계’를 맺기 위한 삶의 자세를 되짚어보게 됩니다. 도발적인 제목에는 작가의 숨은 의도가 있습니다. 물고기를 버리면 길이 보일까요? 소설의 화자 ''는 길을 헤매다 막다른 골목에 내몰렸습니다.


어린 소녀였던 어느 날, 나는 아빠에게 인생의 의미를 묻습니다. 수전증이 있는 생화학자 아빠는 과학자 특유의 사실성에 입각하여 답을 합니다. “의미는 없어!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어.” 운명과 관련된 수많은 스토리텔링이란 인생에 아무 의미도 없다는 무시무시한 감정에 맞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상상해 낸 것일 뿐이라는 거죠. 어린 딸을 앞에 두고 우주에서 우리는 점 위의 점 위의 점이라는 것과 곧 사라질 존재라고 단언합니다. 평생 광대 신발을 신은 허무주의자 같은 아버지였지만 암울한 현실에도 크고 대범한 모습을 보여주셨죠. “넌 중요하지 않아. 그러니 너 좋은 대로 살아!” 삶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에 매여 살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너는 중요하지 않아”는 나에게 종종 다른 효과를 냈습니다.


사회적 신호를 이해하지 못해 외톨이가 된 큰 언니. 사소한 일에도 상처받는 약한 영혼을 지닌 나. 점점 두 딸들에게 지쳐가는 아빠. 기둥 역할을 하던 둘째 언니마저 말리의 사막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아빠 실험실 책상 위에는 <종의 기원>에 나오는 마지막 문장이 걸려 있었죠.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어떤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문구는 스스로 장엄함을 찾지 못하는 나 자신을 꾸짖는 것 같았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이 극에 달할 무렵 나는 알약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다시 깨어납니다.


그러다 대학에 들어가고 몇 년이 걸려 짝사랑하던 곱슬머리 남자에게 마음을 고백합니다. 곱슬머리는 나에게 키스하는 것으로 답을 주었습니다. 해가 일곱 번 바뀔 동안 곱슬머리와 쌓아 올린 안식처는 세상의 냉기를 막아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조금 있으면 마당에서 우리의 아이들과 술래잡기를 할 때 발가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올 잔디의 느낌을 맛볼 수 있겠다 싶을 무렵, 모든 걸 무너뜨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곱슬머리에게서 800킬로미터 떨어진 어느 해변에서 나는 애써 눈길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던 통통 튀는 금발 소녀에게 손을 뻗었습니다. 수영으로 몸이 젖은 그녀의 허리에 손을 얹고 입술을 목에 대자 소녀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별들이 우리를 하나로 감싸 주었습니다. 곱슬머리 남자에게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말했을 때 그는 이제 끝났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곧이 믿지 않았지만, 그의 분노와 상처는 너무 깊었죠. 친구들도 내게 거리를 두었습니다. 삶의 환희가 일순간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 나의 뇌에 거대한 유혹이 나타났습니다. 총신이 반짝이는 금속성의 물건이 내게 손짓을 했습니다.


다행히 총보다 펜이 먼저였습니다. 나는 펜을 들어 곱슬머리에게 미안함을 전했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 약속했습니다. 쓰고  쓰고, 기다리고, 기대했습니다. 반응은 없었습니다. 나의 희망을 꺾는 침묵이 길어지자 펜과 총은 더 자주 충돌했고, 나는 믿음을 버리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펜이 총을 이길 거라는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이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끝내 펜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절망적인 믿음이었습니다. 내 손으로 직접 내 인생을 난파시킨 그 잔해를 다시 이어 붙여보려 몸부림치고 있을 때, 언젠가 들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데이비드는 거대한 '생명의 나무' 형태를 밝혀냄으로써 지구의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을 하는 분류학자입니다. 전 세계를 누비며 어류 원본들을 채집하는 데 일생을 바칩니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데이비드가 수집한 수백 개의 어류 표본들이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습니다. 데이비드는 파괴의 잔해 한가운데서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지체 없이 바늘을 물고기의 목살에 찔러 넣어 이름표를 꿰매 붙여서 폐허에서 표본들을 구했습니다. 결코 승리하지 못할 거라는 그 모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데이비드로 하여금 혼돈을 향해 계속 바늘을 찔러 넣도록 한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고 싶었습니다.


데이비드는 어릴 때부터 수집광이었습니다. 밤하늘 전체에 질서를 부여하는 데 5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고, 지도를 만들어 지구 구석구석 그의 갈구하는 손가락이 지나가지 않는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열성을 보였습니다. 다음은 꽃이었죠. 데이비드는 조용하고 온화한 성품의 형 루퍼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루퍼스는 수수께끼 같은 풍경의 비밀을 하나하나 밝혀내어 데이비드의 호기심을 채어주었습니다. 데이비드는 루퍼스를 '절대적으로 숭배'한다고 했습니다. 루퍼스는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남북전쟁에 참전했고, 당시에는 치료법이 알려지지 않은 열병에 걸려 병사했습니다. 형의 죽음 이후 데이비드는 외로움과 괴로움에 오래도록 힘들어했습니다. 그럴수록 수집에 전념했습니다. 그의 집착과 필사적인 마음, 자신도 모르는 것들의 형상을 붙잡아두기 위해 근육의 온 힘을 동원했습니다. 심리학자 뮌스터 버거는 “사람들이 자신의 무력함을 느낄 때는 강박적인 수집이 기분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 유일한 위험은 여느 강박과 마찬가지로 수집 습관이 신나는 일에서 파멸적인 일로 바뀌는 어떤 지점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라며 수집광들이 수집에 의지해 고통을 달래는 비슷한 현상을 지적했습니다.


데이비드의 스승 아가시는 과학을 가르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책이 아니라 자연을 공부하라”고 했습니다. 자연을 면밀히 조사하면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이었죠. 해부용 메스로 껍질을 가르고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동물들의 '진짜 관계'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가시는 모든 종 하나하나가 '신의 생각'이며, 그 '생각들'을 올바른 순서로 배열하는 분류학의 작업은 '창조주의 생각들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었습니다. 신성한 창조주의 의도뿐 아니라 어쩌면 더 진보할 방법에 관한 실마리까지 알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신의 의도를 쫓는 아가시에게 인간이 원숭이 종으로부터 경계를 넘어 진화했다는 다윈의 진화론은 죽을 때까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이론이었습니다.


데이비드는 메스를 들어 껍질을 가를 수록 다윈이 관찰한 대로 종들 사이의 영역은 불확실한 회색 지대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아이에게 꼬리를 붙들려 카펫 위로 '끌려가는' 고양이처럼 우아하게 진화론자들의 진영으로 넘어갔다.”라고 당시 심정을 표현했습니다. 전 세계를 누비며 어류 분류 체계의 틀을 잡은 데이비드는 성과를 거듭하며 스탠퍼드 대학의 초대 학장으로 취임합니다. 경제적인 제약이 없어지자 데이비드는 ‘자연의 사다리‘의 형태, 그러니까 모든 동물들과 식물들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지위가 정해져 있는지를 드러내 줄 가장 높은 청사진에 대한 추적을 이어갔습니다. 다윈이 신의 존재를 없애버리기는 했지만, 자연을 관통하는 체계적 질서를 찾는 일은 고귀한 일이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평생 해온 일이 거의 다 수포로 돌아갔을 때 데이비드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아내와 자식을 먼저 보내는 개인의 삶에 비극이 닥쳤을 때도 데이비드는 신속하게 움직였습니다. 국화 장식을 주문하고, 유창한 추도사를 만들어 그들을 추모했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질서를 찾으려는 가치 있는 사명으로 돌리고 다시 미국의 황야로 나아갔습니다. 데이비드는 절망에 빠져 나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동정심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절망은 개인의 선택’이기에 그런 감정을 떨쳐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경멸했습니다. 데이비드에게 절망이라는 실존적 탐구는 허망함을 곱씹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것으로 몹쓸 짓일 뿐입니다. 절망이라는 게으름에서 벗어나 경이로운 감각을 느끼고 과학적 수수께끼를 푸는데 에너지를 쓰라고 단언합니다. 데이비드를 잘 알던 한 사람은 “데이비드의 재능 중 특히 양날을 지닌 재능은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설득하고, 그런 다음 무한해 보이는 에너지로 목표를 추구하는 능력이다. 하지만 데이비드는 파리 한 마리를 잡는 데 대포알을 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라고 회상했습니다.


데이비드는 목표를 향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대학운영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직원은 가차 없이 해고하고, 자기 사람이 공격을 받으면 상대방의 약점을 먼지를 털듯이 찾아내 공격했습니다. 데이비드를 해임하려던 대학 설립자 제인이 저택에서 잠들기 전에 마신 물에는 스트리크닌이라는 독이 들어 있었습니다. 제인은 목숨을 구했지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제인은 심신이 안정되기를 바라며 하와이로 휴양을 떠났는데, 그곳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전문가의 소견과 목격자의 증언을 들은 배심원단은 스트리크닌으로 인해 독살되었다고 평결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1500킬로미터도 넘게 떨어진 캘리포니아 연안에 있는 데이비드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돈을 들여 고용한 본토 의사의 다른 소견을 밀어붙여 제인의 사인은 과식으로 변경됩니다. 제인의 몸에서 치사량 수준에 스트리크닌이 나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데이비드가 작성한 물고기 연구서에서 데이비드는 좀처럼 잡히지 않는 가장 성가신 물고기를 잡을 때는 가장 강력한 물질, 스트리크닌을 추천한다고 썼습니다.


학장에서 물러난 후 데이비드가 마음을 두었던 일은 우생학을 전파하는 일이었습니다. 자연의 사다리에서 쳐지는 ‘부적합자‘들이 더 이상 자손을 남기지 않도록 강제 불임화 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우생학자들의 목소리에 솔깃했던 미국 정부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강제 불임을 도입하고 인권을 유린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캘리포니아주 교도소에서는 150명에 가까운 여성에게 동의를 얻지 않고 불임화 수술을 자행했습니다. 판사가 잡범들에게 불임화를 받는 대가로 수감 형량을 줄여주겠다고 제안했던 것이죠. 우생학 이데올로기는 데이비드의 끈기처럼 끈덕지게 살아남았습니다. 데이비드는 그의 말년에 세계를 돌며 전쟁의 위험을 경고하는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자신의 형처럼 우수한 인재가 전쟁에서 죽으면 ’ 부적합자‘들이 남아서 번식을 이어간다는 우생학적 논리였습니다.


“자연의 사다리는 없다”, “자연은 비약하지 않다"라고 다윈은 과학자의 입으로 외쳤습니다. 우리가 보는 사다리의 층들은 우리 상상의 산물이며, 진리보다는 편리함을 위한 것이죠. 그런데 데이비드는 왜 그걸 보지 못한 걸까요? 현장에서 메스를 들고 진리가 담긴 내부를 들여다보았기에 사다리에 대한 그의 믿음을 반증하는 증거들을 산더미처럼 만났을 텐데요. 식물과 동물이 배열되는 방식에 관한 이 자의적인 믿음을 왜 그토록 보호하려 한 걸까요? 데이비드를 처음부터 끝까지 밀어붙인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데이비드에게는 처음 다윈을 읽을 때부터 마지막으로 우생학을 밀어붙일 때까지 어느 시점에서든 그 믿음을 놓아버리는 것은 다시 현기증을 불러들이는 일이었을 겁니다. 방금 자신의 형을 앗아간 세상 앞에서 상실감에 가득 차 떨고 있던 어린 소년으로 되돌아가는 느낌이었을 겁니다. 세상 앞에서, 그 세상을 전혀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겁에 질린 무력한 아이로. 그 계층구조를 놓아버리는 것은 삶의 회오리바람을 풀어놓는 일, 딱정벌레와 매와 박테리아와 상어가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공중으로 날아올라 그의 주변, 그의 위에서 빙빙 돌게 하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것은 지독히도 방향감각을 앗아가는 일이었겠죠. 큰 혼돈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써왔던 바로 그 세계관이었습니다.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이, 개미들과 별들과 함께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떨어져 내리는 느낌. 소용돌이치는 혼돈의 내부에서 바라본, 차마 마주 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시고 가차 없고 뚜렷한 진실. ‘너는 중요하지 않아 ‘라는 진실을 흘낏 엿본 바로 그 느낌 말입니다.


자연의 사다리가 데이비드에게 준 것은 바로 하나의 해독제였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그가 자연의 질서라는 비전을 그토록 단단하게 붙잡고 늘어졌던 이유를 이해가 됩니다. 도덕과 이성과 진실에 맞서면서까지 그가 그렇게 맹렬하게 그 비전을 수호한 이유를. 바로 그 때문에 데이비드를 경멸했음에도 어느 차원에서는 나 역시 데이비드가 갈망한 것과 똑같은 것을 갈망했었습니다.


자연에는 의도가 없습니다. 자연에도 층별로 계급이 존재한다는 자연의 사다리는 우리의 편의에 따라 그어진 상상의 산물입니다. 그것도 인간을 제일 상단에 놓으려는 몸부림의 표현입니다. 기생충은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라 비범한 적응성을 가진 경이 그 자체입니다. 크건 작건, 깃털이 있건 빛을 발하건, 혹이 있건 미끈하건 세상에 존재하는 생물의 그 어마어마한 범위 자체가 이 세상에서 생존하고 번성하는 데는 무한히 많은 방식이 존재한다는 증거죠.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인간이 인간으로 존중받기 위해서는 사다리라는 계층적 사고가 아니라 관계망식 사고가 필요합니다. 서로서로 가라앉지 않도록 띄워주는 사람들의 작은 관계망이, 이 모든 작은 주고받음이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관계망이 받쳐주는 사람들에게는 어떨까요? 그들에게 그것은 모든 것일 수 있고, 그들을 지구라는 이 행성에 단단히 붙잡아두는 힘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소중한 존재입니다. ‘부적합자’라는 단어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나는 중요한 존재’입니다. 개별적인 시선으로 보면 볼 수 없지만, 관계망이 수놓은 수많은 결 안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피를 돌게 하는 존재입니다. 민들레가 그렇지요. 한편에서는 잡초로 치부하지만, 다른 편에서는 간을 해독하고 피부를 깨끗이 하며 눈을 건강하게 하는 약재입니다.


이제 우리는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작가의 도발과 마주 서야 합니다. 분류학적으로 어류는 육기어류, 조기어류, 연골어강 이렇게 3개의 강을 편의상 묶은 분류입니다. 그래서 조류, 양서류, 포유류는 존재하지만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공통의 진화적 참신함” 기준으로 본 사실입니다. 분류학자들은 소, 연어, 폐어 중 관계가 가장 먼 생물로 연어를 지목합니다. 소와 폐어는 폐와 유사한 기관이 있고 후두개가 있지만 연어는 없습니다. 어류에 포함된 3개의 강을 묶은 분류를 합집합으로 묶으면 인류를 포함한 거의 모든 생명체가 포함됩니다. 분류학자 캐럴 계숙 윤은 어류라는 범주에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면서 “물고기를 잃은 잔인한 경험”이라고 했습니다. 영장류 학자 프란스 드 발은 어류라는 분류는 인간이 언어를 사용해 동물의 중요성을 박탈하고 인간과의 유사성을 과소평가하게 만든다고 지적합니다. 어류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세계를 경험하는 제한된 방식에 자신을 가두게 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누구는 과학적 사실 관계를 떠나 어류라는 단어를 좋아하기 때문에 어류를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물고기는 분명 문제가 있는 분류입니다. 물고기 분류에 인생을 바친 데이비드에게 물고기라는 단어를 버리는 것은 자신을 버리는 일이었을 겁니다. 물고기를 익숙하게 사용했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물고기를 버리는 일은 자신을 혼돈 속으로 던지는 일입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익숙한 이 세계에 관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은 또 뭐가 있을까요? 과학을 떠나 다른 분야로 눈을 돌려봅니다. 나에게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데 누군가에게 아픔이 되는 것들이 대표적입니다. 결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결혼을 특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혼을 할 수 없는 동성 커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동성 커플을 고려한다면 결혼에 내포된 대상의 범주가 맞는 것일까요? 갑자기 혼돈에 빠진 것 같습니다.


금발 소녀에게 마음을 뺏긴 일은 모든 사람의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었던 혼돈이었습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 속으로 나를 내던지는 일은 곧 ‘나는 중요’하다는 존재에 대한 무지, 특히 양성애자라는 나의 다름에 내가 무지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혼돈이 가져올 파괴와 상실의 이면에는 희망이 존재합니다. 희망 역시 혼돈의 산물입니다. 중세 어둠의 시기에 지동설을 주장했던 과학자들 덕분에 우리는 별을 포기하고 우주를 얻었습니다. 삶의 양쪽 면을 균형 있게 보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해야 합니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으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입니다. 혼돈은 상상 이상일 수 있습니다. 룰루 밀러의 외침은 단순합니다.

혼돈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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