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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Nov 04. 2022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사랑해야 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픈 것


오늘만은 나를 매료시킨 푸시킨의 시를 거부한다. 생에 눈 뜨는 건 슬픔과 함께 하는 일이고, 슬픔을 느끼는 건 존재에 눈 뜨는 일이다.


너무 힘들어 왈칵 눈물을 쏟아낸 어느 날, 모모는 낯선 사내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늘 함께 했지만 이제는 혼수상태에 빠진 유태인 로자 아줌마, 사랑하는 아이를 제 손으로 키울 수 없는 창녀들, 늙은 장님이 된 하밀 할아버지, 블로뉴 숲에서 동성애자를 상대로 돈벌이를 하는 여장 남자 롤라 아줌마, 또한 창녀였던 엄마와 어느 날 갑자기 자식을 찾으려 찾아와 질투심에 눈이 멀어 엄마를 죽었다고 털어놓는 정신이상 아빠까지.


마치 판도라 상자를 펼친 듯하다. 모나고 불편한 얘기에 눈과 귀를 막고 싶다. 절망에 등을 돌리고 판도라 상자 밑바닥에 남아 있다던 희망을 찾아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어린 모모에게서 희망을 찾으려 한다. 염치없다. 아이가 짊어진 생의 무게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이 빌어먹을 생을 상대하려면 판도라 상자를 헤집고 숨겨진 희망을 찾기보다 확실한 절망을 딛고 서야 한다. 그런데 절망을 딛고 서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희망은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 같은 것이고 행복은 있는 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훔쳐서 쓰레기통에 쳐 넣는 게 맘 편하다. 행복이란 그것이 부족할 때 간절해지는 법. 생을 상대하려면 행복의 기준을 낮춰야 한다. 아니 행복 없이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겪어본 후에, 생이 끌어내릴 수 있는 삶의 밑바닥을 확인한 후에, 행복은 그때 생각해 볼 일이다.


모모는 더 이상 자연의 법칙을 따르고 싶지 않다. 대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세상을 만들고 싶다. 영화 필름을 반대로 돌리듯, 모모는 강물을 거꾸로 돌리고 싶다. 시간을 되돌려 로자 아줌마도 아름다운 처녀로 만들고 싶고, 엄마 얼굴도 보고 싶다. 그보다 더 멋진 일은 없을 것이다. 태양과 광대와 강아지는 지금 그대로도 좋다. 그들은 늙지도 않고 고통받지 않으며 불행에 빠지지 않을 테니까. 자신이 상상하는 세상에 태양과 광대와 개를 제외한 나머지는 죄다 다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킹콩과 프랑켄슈타인은 상상만으로 새로운 세상에 불러올 수 있다. 그런데 엄마만은 안 된다. 세 살 때 로자 아줌마에게 나를 맡기고 돌아오지 않는 엄마다. 얼굴도 따스함도 느낄 수 없던 엄마. 그리움마저 앗아간 이게 생인가? 생이라는 놈, 참 잔인하다.


이제 모모는 생을 미화하지도, 상대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여기 진이 빠지도록 생과 싸우기에 여념 없는 어른들이 있다. 몇 번 힘든 모순의 상황을 거치고 나면 젊은 날의 사랑과 증오 같은 풍부했던 감정을 몽땅 지워버리고 기계처럼 변하는 것이 그들의 모습이다. 우연과 필연이 섞인 왜곡은 스스로를 아프게 하고 감정을 소모하게 한다. 내 편과 네 편, 밝음과 어둠, 성공과 실패, 유(有)와 무(無)처럼. 이렇게 세상을 절반으로 나누고 내 입맛에 맞는 쪽을 편애하는 것이 내가 아는 어른들의 언어다. 절망도 아니고 희망도 아닌, 감정이 소모되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언어다. 모모는 우리에게 한다. 생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자신을 입증하려 말고, 생을 살아가라고. 자기 앞의 생을 살아가라고.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절망'을 딛고 서는 일은 자신의 쌍둥이 누이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절망하고 희망하지 않으면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작가 에밀 아자르는 감정이 메마른 어른이 아닌 철부지 모모를 빌려서 절망하고 희망한다. 어른의 입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는 말들을 주저 없이 내뱉는다.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사람이 미워하고 원망하고 그렇게 절망하는 것은 마음 깊은 곳에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람을 생동하게 만든다. 생동하듯 살아 움직이고 싶다.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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