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깨진 거울이다
사람의 진실은 깨진 거울 사이로 보인다
나르키소스, 1599, 출처 : commons.wikimedia.org“인간아! “
부끄러운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때, 거울에 보이는 자신을 향해 한숨처럼 툭 터져 나오는 한 마디지요.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오래 삭힌 울음 같은 것입니다. 한 동안 거울을 뚫어지게 쳐다보지요. 그런다고 거울은 절대 뚫리지 않아요. 이내 물로 얼굴을 몇 번 식히고 머리와 매무새를 다듬고 나서 밖으로 나옵니다. 부끄러운 짓을 멈출까요? 여러분은 멈추셨어요? 쉽지 않을 거예요.
무경어수 경어인(無鏡於水 鏡於人). 물에 얼굴을 비추지 말고 사람에게 비추어야 한다고 하잖아요. 물이나 거울이나 매 한 가지예요. 사람은 내가 옳고 남이 틀리다는 마음으로 진화했어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을 왼편과 오른편으로 구분을 하면, 처음 만났는데도 자기편 사람들이 상대편보다 똑똑하고 믿을만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도덕적으로도 옳아 보이고요. 그게 사람의 마음이에요. 하물며 거울에 보이는 자기 자신은 어떻겠어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반성의 끈을 놓지 않기란 쉽지 않아요. 오히려 자신을 견고하게 만들죠. 거울은 부단히 자기 내부를 강화해주는 역할을 해요. 아침에 화장실에 다녀오면 사람이 바뀌어 나오잖아요. 화장하고 머리와 옷을 손보고 나면 멋진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요.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은 사람에게 비추어야 볼 수 있어요. 아버지에게 어머니에게 비추어야 자신의 불효를 알 수 있어요. 싸워서 사이가 틀어진 친구에게 비춰야 자신이 얼마나 모진 사람인지 보여요.
우리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비출 용기가 많지 않아요. 물론 어떻게 비춰야 하는지 방법을 몰라서 그렇기도 하고요. 비추려고 하는 사람이나 비춰지는 사람이나 똑같이 방법을 몰라요. 옆에 사람이 있으면 얼굴을 몇 초만 쳐다봐 보세요. 뭐 잘못 먹었냐는 핀잔을 받을 거예요. 얘기만 잘 들어주면 되는 건데 그게 쉽지 않거든요. 얘기하고 싶은 현실은 감당하기 버겁고, 그 현실과 대면하기 두려운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그림에 공감하고, 음악에 젖어들고, 걷기 달리기에 빠져드는 것이죠.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림은 아무리 오래 보고 있어도 뭐라고 하질 않아요. 새근새근 잠자는 아이 얼굴을 보면서 이런저런 하소연 했던 기억이 나시죠? 같은 이치예요.
“인간아!”라는 울음으로 부끄러운 짓을 그만두지 못하면 그다음은 포효하는 외침이에요. 거울에 보이는 얼굴이 꼴도 보기 싫어서 짱돌을 들어 거울에 던져 버리죠. 거울에 보이는 사람은 결코 자신이 될 수 없다는 선언이에요. 저는 깨진 거울을 그림이라고 생각해요. 그림에는 인류가 걸어온 역사가 담겨 있어요. 그림이 전해주는 보편적 메시지 앞에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거죠. 사람의 진실은 깨진 거울 사이로 보이는 거예요. 사람의 본성은 깨진 거울 너머에 있는 거고요. 거울은 겉모습만 천착하게 만들어요. 깨지지 않았다면 들여다보지 않았을 거예요.
그리스 신화에도 물에 얼굴을 비추는 장면이 나와요. 나르키소스는 아름다운 미소년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그를 흠모하죠. 젊은이들은 그와 가까이 지내고 싶고, 소녀들은 그에게 사랑을 갈구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의 마음도 받아주지 않았어요. 강한 자존심이 그 누구와의 사랑도 허락하지 않는 거죠. 우리말에 메아리에 해당하는 숲의 님페 에코도 나르키소스에게 실연을 당했어요. 나르키소스의 사냥하는 모습에 반한 에코는 몰래 나르키소스를 따라다녀요. 나르키소스는 잔인하게 에코의 사랑을 거절해 버리죠. 에코는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하다 몸은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아요. 나르키소스를 향한 수많은 원망이 하늘을 찌릅니다.
“그도 사랑하는 것을 영원히 얻지 못하게 하소서!”
나르키소스는 결국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로부터 기이한 형벌을 받게 돼요. 바로 단 한 사람, 자기 자신을 알게 되는 형벌이죠. 이게 과연 형벌이 될까 헷갈리시죠?
사냥 중에 목이 마른 나르키소스는 샘을 찾았어요. 수정처럼 맑은 샘이에요. 그가 샘에 다가가자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아름다운 형상이 나타납니다. 신이 빚어 놓은 듯한 모습에 나르키소스는 넋을 잃어버렸어요. 바로 샘에 비친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된 것이죠. 잡으려고 손이 물에 닿으면 흩어져 버려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어요. 애가 타서 울부짖어도 자신의 사랑은 받아들여지지 않지요. 나르키소스는 결국 샘을 바라보는 자세로 숨을 거뒀어요. 죽은 나르키소스는 한 송이 수선화로 피어나 물을 바라보는 꽃이 되었답니다.
나르키소스를 다룬 수많은 그림 중에서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3~1610)의 그림은 유독 인상적이에요. 물에 비친 나르키소스의 모습은 자세히 보면 미소년의 모습과 거리가 멀어요. 어둡고 추한 모습이죠. 다른 화가들은 대부분 물에 비친 모습 역시 미소년으로 그렸어요. 그런데 카라바조는 달랐어요. <나르키소스> 그림이 아니더라도 카라바조의 그림은 평소에 접했던 다른 화가의 그림과 확연히 다른 느낌이 들어요. 강한 빛과 어둠을 대조적으로 표현해서 장면에 극적 긴장감을 불어넣는 방식이 그렇고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들을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도 신선했지요. 정형화된 예수 모습 대신에 볼 살이 통통한 빵집 형 같은 예수는 파격이었어요. 심지어 성모 마리아의 얼굴에 자신이 좋아하던 창녀의 얼굴을 그려 넣을 정도였어요. 과한 면도 있었지만 정형화된 그림에서 느껴지던 거리감이 사라지면서 오히려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거든요. 때로는 너무나도 사실적인 표현에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어요.
카라바조는 영웅을 대체한 평범한 인간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자주 그려 넣었어요. 그리는 사람에 따라 자화상에 드러나는 자의식은 그 의미가 달라지거든요. 뒤러의 자화상에는 주체할 수 없는 삶의 자신감이 물씬 풍겨요. 샤갈은 줄무늬 재킷 차림의 고상하고 확신에 찬 지성인으로 자신을 표현했어요. 렘브란트의 자화상에는 여유로움과 권위가 담겨 있고요. 카라바조의 자화상은 그 자체로 타협 없는 묘사의 정수예요. 자신의 내면에 부유하는 추악함을 실오라기 하나 가리지 않고 드러내는 일은 보는 이에게 잔혹하다는 생각마저 들게 하거든요. 마치 시인 김수영이 시내 한복판에서 우산대로 아내를 때려눕힌 범행 이후, 집에 돌아와 마음에 꺼려지는 생각을 담은 시 <죄와 벌>을 읽는 기분이었어요. 김수영이 노심초사했던 대목은 아는 사람이 그 장면을 보았을까 하는 일이고 그보다 먼저 현장에 두고 온 우산을 아까워하는 마음이었어요. 저 같았으면 감추기에 급급해 기억에서 지워 버렸을 일을 타협 없이 시에 담아서 묵묵히 바라보고 있더라고요.
카라바조가 그린 <나르키소스> 그림은 신화를 그린 그림이면서 한편으로 자기 자신을 그린 자화상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양날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요. 미소년의 모습도, 샘에 비친 추악한 모습도 모두 자신의 모습이에요. 카라바조는 극단적 자기애의 표본 나르키소스를 자신과 동일시했어요. 기독교적 질서가 지배하는 광기의 시대에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 다르게 표현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틀린 것이었죠. 카라바조는 자신을 몰아세우는 세상이 미워서 악동처럼 행동했어요.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지만, 자신만은 스스로를 인정해 주어야 했어요. 나르키소스가 자기 자신을 사랑했던 것처럼요. 추악한 모습을 감추지 않고 그림에 담아 자신을 향해 짱돌을 던지면서도, 그 너머에 있을 자신의 진심에 공감해 주었던 것이죠. 카라바조가 바라본 물은 결코 거울이 될 수 없어요. 자신을 하얀 캔버스, 바로 그림에 비춘 것이에요. 그림은 깨진 거울이에요. 깨진 거울 사이로 보이는 카라바조의 진심이 느껴지지 않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