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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Jan 04. 2023

곁의 자리

우리는 가장 무력할 때 가장 위대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연초에 기쁜 일이 있어 글 올립니다.

2023년부터 기호일보에 "강태운의 미술인문학"을 연재합니다. 그동안 브런치에 부끄러운 글을 내어놓고 다듬는 과정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강태운의 미술인문학"을 통해 자신을 물이나 거울에 비추지 않고 사람에 비추면서 나와 우리를 이해하고 나아가 우리 사회의 긍정적 관계 맺기를 추구하고자 합니다.


곁의  자리

http://www.kiho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10934

<선한 사마리아인>, 1890, 출처 commons.wikimedia.org


빈센트 반 고흐는 생레미 정신병원에서 지낼 때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갇힌 공간이라 모델을 구하기 어려워서 선배 화가들의 그림을 모사했지요. 반 고흐에게 예수의 얼굴을 그릴 수 있는 화가는 세상에서 오직 렘브란트와 들라크루아뿐이었습니다. 신앙과 그림에서 들라크루아는 반 고흐의 롤 모델이었죠. 반 고흐가 그린 <선한 사마리아인>은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따라 그린 겁니다.

여기 강도를 만나 심하게 다쳐 고통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다친 사람을 모른 체하며 지나쳤지요. 평소 천시 받던 사마리아인은 다친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돌봐줍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에 담긴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 해보면 알겠지만 단순한 일일수록 머리가 아닌 몸이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실천이 담보되어야 한다는 뜻인데 그만큼 어렵다는 반증입니다.


 진정한 이웃을 생각하게 하는 선배의 그림을 모사하면서 반 고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정신병원에 갇힌 채 미쳐가는 사람들 옆에서 반 고흐는 지루함과 슬픔에 숨이 막힐 것 같습니다. 더 두려운 건 재발한 발작으로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할 수 있다는 현실입니다. 동생 테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자신의 그림을 외면합니다. 그림을 그릴 용기를 잃어 도움이 필요할 때, 들라크루아의 강렬한 색채는 자신을 지지하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반 고흐는 죽기 전까지 서로 곁이 되어주는 화가공동체를 꿈꾸었습니다. 젊었을 때 목자가 되어 고통 받는 이들을 돕고자 했듯이 그림을 통해서만 말해야 하는 화가들의 어려움을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돕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반 고흐는 그림 속 고통 받는 자가 되어 현실에서 도움이 필요한 자신을 대면합니다. 동시에 사마리아인이 되어 주위에 곁이 되어주고자 합니다. 반 고흐의 사전에는 안팎으로 고통을 외면하는 일이란 존재하지 않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반 고흐가 그림에 담아낸 따뜻함의 크기만큼 세상은 고통 받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고통은 실존적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해줍니다. 분명 자신이지만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모습이지요. 그 만남은 개인의 내면과 주위의 관계를 파괴하면서 시작됩니다. 삶의 고삐를 고통에게 넘겨준 채로 자신은 객이 되어 고통이 이끄는 대로 휘둘립니다. 애써 평온했던 일상은 마치 댐이 무너지듯 한 순간에 부서져 버리죠. 반 고흐 스스로 자신을 정신병원에 가두게 했던 바로 그 고통입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지요. 고통의 시대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반 고흐가 꿈꾸었던 '곁의 자리'입니다. 관심과 연대가 희미해진 요즘 곁의 자리가 어디쯤 일지 궁금합니다. 인권재단 '사람'의 박래군 소장은 소녀상이 아니라 곁에 있는 의자라고 했습니다. 소녀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리가 아니라, 의자에 앉아 소녀와 같은 곳을 바라보는 자리입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윤동주의 시 <병원>에 나오는 ‘그가 누웠던 자리’를 지목합니다.


"서정은 언제 아름다움에 도달하는가. 인식론적으로 혹은 윤리학적으로 겸허할 때다. 타자를 안다고 말하지 않고, 타자의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자신하지 않고, 타자와의 만남을 섣불리 도모하지 않는 시가 그렇지 않은 시보다 아름다움에 도달할 가능성이 더 높다. 서정시는 가장 왜소할 때 가장 거대하고, 가장 무력할 때 가장 위대하다. 우리는 그럴 때 ‘서정적으로 올바른’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 서정적으로 올바른 시들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안다. 그것은 ‘그가 누웠던 자리’다." (몰락의 에티카, 신형철)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 옆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왜소함과 무력감으로 엎드려 울먹이는 자리가 바로 곁의 자리입니다. 그림에서 다친 사람을 도운 이는 가장 무력한 위치에 있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우리는 가장 왜소하고 가장 무력한 자리에 섰을 때, 우리 안에 숨어있던 능력과 잠재력을 자각합니다. 무력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끼리 서로 연민하고 소통하는 통로를 찾은 것이죠. 바로 무력함의 연대입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아픔과 맞서 싸우는 자리가 아니라 곁을 통해 서로 동행하는 자리입니다.


 새해를 맞는 기대와 달리 가슴 아픈 참사로 인해 무력감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는 가장 무력할 때 가장 위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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