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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Jan 17. 2023

일상 속의 탕자

참회와 용서 그리고 사랑

http://www.kiho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12840

<돌아온 탕자>, 1668, 출처 commons.wikimedia.org


렘브란트 반 레인은 빛을 훔친 화가로 유명합니다. 극적인 효과를 끌어내기 위해 빛과 어둠을 대비시켰죠. 어둠 속에 묻혀 사라질 것만 같은 순간은 도리어 빛을 받은 공간을 부각해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그런데 <돌아온 탕자>에서 빚어낸 빛은 극적이면서 한없이 따뜻합니다. 빛 알갱이들이 자신의 체온으로 얼어붙은 공간을 녹이는 것만 같습니다.


 여기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참회하는 탕자가 있습니다. 탕자는 방탕한 사람을 뜻하지요. 밑창이 다 해진 신발과 굳은살 박인 발바닥, 그리고 해진 옷은 돌아온 탕자가 겪은 그간의 시련을 말해줍니다. 작은 아들은 미리 상속받은 재산을 나귀에 싣고 하인을 앞세우고 떠날 때만 해도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방탕한 생활과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했습니다. 끝내는 돼지의 먹이를 탐하고, 돼지우리에서 잠을 청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아버지는 참회하는 아들을 두 손으로 꼬옥 품어줍니다. 두 손이 내려앉은 아들의 등은 온갖 세파를 겪은 탕자의 등이면서 상처를 가진 우리 모두의 등이죠. 가장 따뜻하고 밝은 곳입니다.


 사랑과 참회의 절정을 보여주는 장면 앞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려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아버지와 동생을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형의 존재입니다. 방탕한 생활로 탕자가 되어 돌아온 동생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아버지를 형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묵묵히 아버지의 곁을 지킨 자신에게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환대입니다. 동생은 언젠가 또 집을 떠나 방탕한 생활에 빠질 것이기에 저 참회는 믿을 수 없고 용서는 과분하다는 것이지요. 꽉 잡은 형의 양손에서 사랑과 질투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 내면의 복잡한 심정이 느껴집니다.


 참회보다 더 어려운 것이 용서입니다. 용서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고 겁 없이 도전해서도, 무디어지기를 기대해서도, 견디기 힘들다고 강요해서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한 패배입니다. 자신이 패배한 이유가 오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자기 자신을 모질게 몰아붙이는 일이죠. 진정한 용서는 겸손해지는 것이고, 겸손해지기까지 자신을 몰아붙인 스스로에게 용서를 비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형의 모습은 생(生)과 정면으로 마주할 기회를 잃은 채 시기와 질투에 눈이 먼 일상 속의 탕자, 바로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형의 모습에는 탓할 수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가 담겼습니다.


 우리는 자주 주변에 울타리를 치고 내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편애하고 울타리 밖은 배제합니다. 심지어 증오하지요. 탕자처럼 가족이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코로나19 시대에 우리는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일상을 잃었습니다. 이 비극은 역설적으로 우리 모두를 상실감이라는 하나의 울타리로 묶어주었죠. 우리는 모든 갈등을 뛰어넘어 서로를 위로했습니다. <페스트>의 저자 알베르 카뮈는 ‘우리 모두가 페스트라는 추상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적으로 삼았던 사람들까지 이해의 대상이었고 누구 한 명 죽게 둘 수 없었다.’고 회고합니다. 인류 역사 전체로 보면 우리는 사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잃고 실의에 빠진 이들을 사랑으로 안아주는 것은 묵묵히 자리를 지킨 자의 책무입니다.


 렘브란트 역시 빛과 어둠이 대비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반 고흐는 세상에서 두 명의 화가만이 예수의 얼굴을 그릴 수 있다고 했는데, 그 한 명이 바로 렘브란트입니다.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대표 화가였기에 부유한 귀족들의 초상화는 죄다 렘브란트의 손을 거쳤을 만큼 명성을 얻었습니다. 명성만큼 화려한 생활로 말년에 파산선고를 해야 했고, 아내와 아들을 저 세상으로 먼저 보냈습니다. 렘브란트는 참회하는 자신은 물론 인간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갈등의 순간을 빛과 어둠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 삶은 무엇으로 완성될까요? 정답이 없는 화두이지요. 다만 참회와 용서 그리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렘브란트가 전하고자 했던 회심입니다. 렘브란트가 훔친 빛이 종소리처럼 울려 퍼집니다. 따뜻한 빛은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 걸까요?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일상 속의 탕자,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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