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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Jan 31. 2023

자기 앞의 생

자신을 입증하려 말고 생을 살아가라고

http://www.kiho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14465

여기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킨 화가가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6.25 전쟁이라는 비극의 한가운데서도 자기 앞의 생을 살아낸 민중의 정서를 절제된 감정으로 표현하였죠. 미석(美石) 박수근입니다. 박수근이 생각하는 예술에 대한 견해는 평범합니다.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인지 자신의 견해를 담아낼 내용과 형식을 오랜 기간 연구했습니다.


화강암의 표면과 같은 두툴두툴한 느낌의 질감과 담백한 색채는 박수근의 독창적 해석입니다. 오랜 세월을 거친 석불이나 석조 건축물의 표면에서 느껴지는 정서를 그대로 캔버스 위에 옮겨 놓았죠. 세월이 느껴지는 형식 위에 올릴 수 있는 내용으로 한 순간 타오르는 영화(榮華)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강한 남성상이나 우아한 차림의 신여성을 올릴 수는 없는 것이죠.


박수근은 자신이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만나는 인간상을 즐겨 그렸습니다. 박수근의 그림에는 제한된 소재가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아무리 재미있는 일도 반복하게 되면 정형화되고 결국에는 싫증나기 마련입니다. 박수근은 이러한 반복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반복을 즐기는 사람은 일상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사람입니다. 평범한 일상을 추상해서 불필요한 것을 없애고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이지요.


세월이 쌓여도 변하지 않는 본질은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박수근이 그린 소재는 여인과 여인 군상이 절반에 가깝고, 그다음은 나목(裸木)이었습니다. 평범하고 소박한 소재는 평상시에는 그 가치가 드러나지 않지요. 혼란과 방황의 시기에는 자신과 가족을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 되어 줍니다.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딸들은 세대를 이어가며 인내했던 세월 그 자체입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 속에서 그 어떤 여성도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상처와 고난에도 불구하고 버팀목 역할을 했던 여성에 대한 박수근의 따뜻한 시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박수근이 그린 나목은 잎은 떨어지고 가지가 잘려나가 생명을 잃은 나무처럼 보입니다. 공간은 단순화되고 중심이 되는 소재만 남은 간결한 구도는 신기하게 나목에게 강한 생명력을 부여합니다. 나목은 상징적이면서 인상적인 것을 추구하던 박수근의 언약과 같습니다. 언젠가는 잎을 피우는 봄이 온다는 약속이지요. 소설가 박완서는 나목이야말로 암담한 세월을 미치지 않고 환장하지 않고 견뎠던 박수근 자신에 대한 언약이었다고 회상했습니다. 박수근이 생계를 위해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릴 때, 박완서는 학교에서 배운 영어로 초상화를 그릴 미군 고객을 유치했습니다. 가까이에서 박수근을 지켜보았죠.


박수근은 하늘 높이 비상하고 싶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늘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어 아래로 향했습니다.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사람은 언제고 주위에 있기 마련입니다. 각자 가는 길과 속도가 다르니 마냥 부러워할 일은 아닙니다. 박수를 쳐줘야지요. 비상했던 사람들은 박수를 치기가 무섭게 추락하기도 합니다. 하늘을 날아오르면서도 두 발은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합니다. 내용과 형식이 설득력 있게 균형을 이뤄야 오래갑니다. 박수근은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들에게서 먼저 인정을 받았습니다. 한발 물러서서 보았던 그들에게 박수근은 한국적인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화가였습니다.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자신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관계망 속에서 살고 있는가? 하지만 땅에서 발을 떼고서라도 하늘 높이 비상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모두 원하는 곳까지 날아가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무엇을 표출하고 싶은지를 잃어버렸을 때 사람은 추락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비극의 한가운데 세우고 마는 것이죠. 그럴 때면 아카시아 잎을 떼어가며 점을 치듯 살자와 죽자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합니다. 살고 싶다. 죽고 싶다. 살고 싶다. 죽고 싶다. 그 순간을 기다려 박수근은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자신을 입증하려 하지 말고 생(生)을 살아가라고. 자기 앞의 생을 살아가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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