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말에 이르기를, 방이나 집은 높고 큰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새지 않으면 곧 좋고, 입는 옷는 좋은 비단이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화사하고 따뜻하면 곧 좋고, 마시고 먹는 것은 진귀한 반찬이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배가 부르면 곧 좋고, 장가들어 아내를 취하는 것은 얼굴이 미색이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현명하고 착하면 곧 좋고, 친척은 옛 친척이냐 새 친척이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오고 가면 곧 좋고, 이웃 사람은 높고 낮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화목하면 곧 좋고, 친구는 술 먹고 밥 먹는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도와주고 유지시켜 주면 곧 좋다.
명심보감 안분편(安分篇) 마지막에 나오는 구절이다.
진정한 친구란 좋은 시절 술과 음식을 나누면서 친분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힘든 시절을 함께 보낸 사람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힘든 친구를 모른 척하지 않고 물질적으로 또한 정신적으로 그 상황을 견디도록 지지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자본과 물질에 영향을 받지 않는 관계가 있을까? 이런 인식 때문인지 살짝 주고받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내 안에서 친구라는 의미가 왜곡되어 있었다.
부지(扶持)는 친구를 도와주고 견디어 유지시켜 주는 것이다. 도와준다는 것은 이우보인(以友輔仁)으로 교제를 통해 인(仁)을 배우고 행하는 수준을 높이는 것이고, 유지시켜 주는 것은 친구가 비틀거리고 우왕좌왕 방향을 잡지 못할 때 중심을 잡도록 지켜준다는 뜻이다. 나쁜 길에 관심을 갖는 친구가 그 길에 빠지지 않도록 꾸짖는 것이고, 길을 찾지 못하는 친구를 견디어 유지하도록 힘이 되어 주는 것이다.
배꼽 친구가 좋은 이유는 무심(無心)하기 때문이다. 좋은데 그 이유가 특별히 없다. 관찰하고 비교하는 대상이 아니라 사이좋은 풍경 같은 존재다. 주고받는 관계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심(心)이 없다는 얘기다. 부지(扶持)는 친구가 항심(恒心)으로 인(仁)을 배우고 행하도록 옆에서 함께 하는 것이며, 그 행위에 심(心)이 없다는 뜻이다. 무심하게 함께 한다는 것은 인간관계가 닿을 수 있는 궁극의 지점이다. 언젠가 영화에서 보았던 노부부는 꼭 친구처럼 보였다. 무심과 사랑이 조화롭게 자리한 형국이 아닐까 싶다.
친구에 대해 분명히 알았으니 부지(扶持) 할 일만 남았을까? 그 시작은 자신이 친구를 부지(扶持)할 수 있다는 오만함을 버리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겸손하지 않으면 부지(扶持)하고 싶어도 친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