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리자,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완성의 완성, 그리고 깨달음

by 윌마


지난주에 여권용 사진을 찍었다. 거울 앞에서 매무새를 다듬고 카메라 앞에 앉았다. 정형화된 촬영 구도에 따라 시선 방향이 정해지니 사진사는 내게 살짝 미소를 띠어보라고 권한다. 샘플로 촬영된 몇 장의 사진을 모니터링했다. 미소는 눈과 입으로 표현된다. 과하면 가벼워 보이고, 부족하면 어둡다. 살짝 웃자니 눈꼬리에서 입술 가장자리까지 전면 근육이 미세하게 떨린다. 차라리 크게 웃는 편이 편하지 미세한 떨림을 한동안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물이 가득 찬 그릇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이동하려면 큰 힘이 아니라 미세한 떨림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사진사도 다르지 않다. 앞에 앉은 손님의 호흡과 미세한 미소를 눈으로 느끼고 온 몸으로 살핀다. 감을 잡지 못하는 손님을 위해 직접 미소를 짓기도 한다. 나비의 날갯짓보다 가벼운 미소의 떨림을 직감적으로 느끼며 최적의 순간을 찾는다. 그렇게 촬영된 사진 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고르면 일은 마무리된다. 사진은 순간을 포착한다.

레오나르도는 그림을 '이차원 평면에 그 평면과는 완전히 분리된 듯한 대상을 그려내는 창조 행위'라고 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화가의 손 끝에서 이루어진다. 화가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손 끝은 다르게 움직인다. 눈 앞에 현실을 날카로운 가장자리와 선으로 인식한다면 대상의 형체는 뚜렷한 선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빛이 망막의 여러 지점에 닿는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대상의 형체를 선이 아니라 흐릿한 가장자리를 통해서 본다. 그래서 하나의 대상은 빛과 어둠이 밀고 당기는 변주만큼 다양한 모습을 갖는다. 그림은 자신만의 진실을 담는 것이다. 그 진실에 관객의 마음이 움직인다면 보편성을 얻어 명화로 거듭난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보편성은 이론과 경험을 근거로 정당성을 얻는 과정을 거쳐 인류의 본성으로 자리 잡는다. 오늘날의 인권과 평등이 보편적 지위를 얻기까지 인류가 걸어온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보편적 진리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시대정신에 따라 도전을 받으면서 인류의 집단적 의식 속에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모나리자의 미소가 획득한 보편성은 어떤 점에서 개별적 인간의 마음을 움직였기에 사람들은 모나리자의 미소에 가장 신비롭고 매력적이라는 지위를 부여했을까?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담아내는 일은 입꼬리 선 하나를 살짝 올린다고 되지 않는다. 희미한 미소 이면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근육과 신경의 움직임, 그 움직임에서 비롯된 떨림이 일으키는 부피감, 그 부피감을 드러내는 빛과 색의 상호작용이 그림 안에서 살아 숨 쉬어야 한다. 레오나르도는 어두운 영안실에서 시체의 피부를 벗겨 그 안의 근육과 신경을 관찰하며 밤을 보냈다. 물 소용돌이나 꼬불꼬불한 머리카락을 관찰하면서 기하학을 시각적 그림으로 풀어내려 했고, 자연의 패턴에 담긴 형태의 변화를 이해했다. 표면에서 반사되는 빛과 더 깊은 곳에서 튕겨 나오는 빛의 상호작용을 관찰하고 부드러운 색상 전환을 통해 포착하기 힘든 입체감을 살리는 법을 익혔다. 빛의 상태나 관람객의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 그녀의 미소는 해부학, 빛과 광학 그리고 기하학의 시각화 같은 미학이 만나는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모나리자만큼 동작과 감정이 서로 긴밀히 얽혀 그려진 그림은 이전에는 없었다. 의뢰받은 초상화 한 점에 레오나르도가 이렇게까지 심혈을 기울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초상화의 모델이 되어 화가 앞에 앉아 본 사람이라면 그 잠깐의 순간이 낯선 경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시간만큼은 온전히 내 눈과 입, 들고 나는 숨, 그리고 보이지 않는 근육들의 떨림까지 평소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나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 '나'이면서 또 하나의 '우주'를 만나는 시간이다. 복잡한 일련의 심리적 반응은 자연스럽게 표정으로 드러난다. 드러난 표정과 몸짓은 앞에 있는 화가에게도 전달된다. 표정에 담긴 복잡한 감정을 담아낸 그림이라면 그 초상화는 살아 있는 그림일 것이다.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라는 예수의 말이 있은 직후의 반응을 담은 <최후의 만찬>에서 열 두 제자의 동작을 보면 마치 영혼을 실은 감정의 파문이 밀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렇게 감정의 외부 발현에 능통한 레오나르도는 모나리자에게서 느껴지는 다양한 감정의 지문을 캔버스에 담아 '완성'이라는 말로 포장해서 의뢰인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죽기 전까지 이 그림을 보관하면서 반복해서 고치고 다듬었다. 레오나르도의 삶은 손에 잡히지 않는 현실의 속성과 인식의 불확실성을 손끝으로 느끼는 여정이었다. 레오나르도는 현실과 상상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 경계를 허무는 일이란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나와 나, 나와 너, 나와 세상 사이에는 베일이 존재한다. 우리는 세상을 베일을 통해 본다. 그래서 밖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 절대로 진짜 감정을 전부 알 수가 없다는 것이 역사상 가장 뛰어난 혁신가의 깨달음이었다. 그의 작품이 미완성의 완성으로 남아 있는 이유이다.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가 “흐릿한 윤곽과 그윽한 색상을 통해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와 합쳐지게 하고 상상에 여지를 남겨주는 레오나르도의 발명품”이라고 극찬했던 회화 기법 '스푸마토'는 어쩌면 밝음과 어둠 사이의 변주만큼이나 다양한 인간의 감정과 대자연 앞에서 레오나르도가 취했던 겸손의 방편이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손가락으로 문질러 안개처럼 흐릿하게 표현해서 그림자와 깊이를 표현했다.) 그렇기에 그녀의 미소는 본질적으로, 태생적으로 포착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고, 더 나아가 인간의 복잡한 감정을 묘사하고 자연을 닮은 인간의 본성을 찾아가는 여정으로 읽혀야만 했다. 모나리자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인간의 마음을 닮았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레오나르도다빈치#윌터아이작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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