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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니 Nov 06. 2024

암 요양 병원 탈출기

용기와 눈물

암 투병을 하며 궁금해졌다. 투병날짜는 어떻게, 왜 세는 거지? 아가를 키우며 얼마나 크는지 계산하는 것처럼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잘 버티고 있는지 용기를 갖기 위해 세는 것인가? 그렇다면 난 서울 병원으로 옮겨와 첫 검사를 한 날을 기준으로 난 +99일째 아만자다.



7월, 8월에 암 선고와 수술, 그리고 항암까지 너무 바쁘게 후다다닥 치르며 서울과 대구를 오가다 보니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른다. 긴 수술 (약 10시간 정도의 개복 수술) 이후에 바로 암 요양병원에 들어가려던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이 몸으로 바로 집에 가면 가족들도 케어하느라 힘들 것 같았고 갓 스테이플을 뽑은 배에 아가가 점프라도 하면 죽을 것 같았다.


  에너제틱한 아가를 보여주기 위한 거제도 여행 때의 사진. 2024


약 일주일정도 쉴 겸 다녀오기로 하고 그곳으로 퇴원을 했는데 상주해 계신다는 의사 선생님의 느낌이 좀 싸했다. 계속 "이 교수님이 약은 이걸 쓰셨네. 이건 옛날 건데 왜 그랬지? 이 암은 항암 할 것 같아요." 등등, 자신을 추켜세우려고 밑밥을 까는 것 같았다. 그 후의 대화는 대충 이랬다.


의사 선생님: 미국에서 왔다고요? 미국 어디요?

나: 뉴욕 근처 동부에 있어요.

의: 오- 정말요? 내 남동생네도 그쪽에 있어요. 미국에 있으면서 blah blah blah...


3일에서 5일 안에 퇴원할 줄 알았던 나는 간수치가 내려가지 않아 거의 2주를 병원에 있었다. 그리고 쉬려고 온 요양병원에서 만난 의사 선생님은 미국에 있는 본인의 가족이 어찌나 훌륭한지 말씀을 하고 싶어 하셨다. 다행히 점심시간이 끝나간다며 닦달하던 코디선생님 덕분에 벗어날 수 있었지만 정말 고역이었다.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갔다. 퇴근할 때까지 간 절제식을 먹고 있던 나는 먹고픈 음식들은 많았었지만 최대한 양심적으로 먹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식당에서 마주친 음식은 새빨간 육개장과 브런치와 어울리는 샌드위치였다. 그나마 육개장보단 빵이 낫겠다 싶어 먹는데 점점 이 요양원에 대한 기대감이 떨어지고 있었다.


마지막 킥은 방. 여러 사람이 셰어 하는 곳인 건 알고 있었지만 무언가 느낌이 좋지 않았었다. 8월, 한여름인데도 불구 활짝 열려있는 창문과 습한 공기.  아무래도 세네 명이 방을 공유하다 보니 온도와 환기에 대한 의견일치는 어려우리라. 심지어 내가 쓸 침대는 15분 전 누가 쓰다가 대충 정리를 해놓고 간 느낌의 주름들이 져 있었다. 그래서 난 바로 코디선생님께 내려가 혹시 입소취소가 가능한지 물었다. 선생님께선 당연히 몇 시간 안에는 가능하다고 하셨으며 무슨 문제가 있냐고 물어보셨다. 그때 나는 집에 너무 오랫동안 가지 못해 아기가 너무 보고 싶어요 하며 울어버렸다. 수술 전날에도 울지 않았던 나인데, 아기 생각을 하니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암 선고받았을 때와 수술이 길어졌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난 아가보다 엄마 걱정을 더 많이 했다.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더 디테일하게 해보고 싶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하여튼 그렇게 개복수술을 한 지 2주 만에 난 짐을 다시 싸서 혼자 씩씩하게 서울역으로 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대구로 향했다. 만약 암 환자인데 요양병원을 고민한다면 가보고 결정을 하는 것을 추천한다. 나는 시간이 애매했고 아는 것도 너무 없어서 좋다는 곳으로 가기로 했었지만 항암 할 때 갔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수술 후 회복을 하러 가는 곳은 아닌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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