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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nKo Mar 10. 2016

세련미 꽉 찬 마드리드 전통시장, 메르까도 산 미구엘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여행기 그 여덟 번째 이야기

마요르 광장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산 미구엘 시장(메르까도 산 미구엘)'이라는 곳이 있다. 1830년대부터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일종의 재래시장이다. 흔히, 재래시장이라고 하면 적당히 지저분하면서 사람 냄새가 나는 그런 공간을 떠올리는데, 이 곳은 애초 생각했던 이미지와 조금 달랐다.

산 미구엘 시장은 철제 골조와 통유리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밖에서 얼핏 봐서는 시장인가 싶을 정도로 고급스러운 자태를 뽐낸다. 오래전, 화재로 인해 기존 건물이 모두 불에 타고 남은 철근에 유리를 가져다 붙인 것이 지금의 산 미구엘 시장이다. 원래 건물의 형태는 그대로 보존하면서도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시도, 화재 사고를 이겨내는 스페인 사람들의 방식이다.

시장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신선한 과일이 눈에 들어왔다. 알록달록한 색깔이 너무나 선명해서 처음에는 조형물이 아닐까 의심도 들었다. 스페인은 워낙 땅이 비옥하고 햇빛도 풍부하기 때문에 과일의 당도가 매우 높다. 가격도 저렴한 편이어서 과일을 종류별로 한 보따리 가득 담아 집으로 가져가서 배가 터질 때까지 먹었다. 과일 값이 워낙 비싼 일본에서는 엄두도 못냈던 일이다.

여기저기 둘러보다 우연히 발견한 디저트, 바게트 빵에 다양한 종류의 토핑을 올린 '핀초'라는 스페인 전통 음식이다. 얼핏 보면 초밥이랑 비슷한 모양인데, 몇 개 집어먹어보니 맛도 꽤 괜찮다. 다음번엔 와인과 함께 먹어보리라.

모히또와 핀쵸 몇 개를 집어 들고 가게 앞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 일행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술과 안주를 즐기고 있었다. 부어라 마셔라 하는 우리의 술 문화와 달리, 스페인에서는 가볍게 한 잔 하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많다. 술자리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좋아하지만 정작 술을 잘 못하는 나로서는 이런 문화가 너무 부러웠다.

산 미구엘 시장에는 핀초나 타파스만 있는 게 아니다. 하몽부터 시작해서 해산물까지 다양한 메뉴가 있으니 입맛대로 고르기만 하면 된다. 술이든 안주든 메뉴의 선택폭이 다양하다는 것이 산 미구엘 시장이 가진 최고의 장점이다. 잔이나 접시가 비워질 때쯤이면 옆 가게에 가서 새로운 메뉴를 가져다가 이야기를 나누며 먹다 보니 어느새 배가 점점 불러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산 미구엘 시장에서 배를 채우고,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나눴다. 다음 목적지는 산 기네스(San GInes),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는 대왕 츄러스로 유명한 곳이다. 


산 기네스는 골목 사이에 위치해 있어 길을 찾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다. 구글 맵에 의지하더라도 방향이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는 주저하지 말고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워낙 유명한 가게인데다, 스페인 사람들은 남 도와주는 것을 낙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니 아마 친절하게 잘 알려줄 것이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가게 안은 사람들로 꽤 북적였다. 일단 주문을 하기 위해 카운터 앞에 줄을 선 후, 다른 사람들을 조심히 살펴보니, 다들 츄러스+쵸코라떼 세트를 고르는 눈치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당황하지 않고 능숙한 스페인어 발음으로 '츄러스, 쵸코라떼, 그라시아스'라고 이야기했다. 주문을 마친 후, 자리를 잡고 기다리면 종업원이 직접 자리로 주문한 음식을 가져다준다.

츄러스 6개와 쵸코라떼 1잔, 가격은 3.9유로 - 우리 돈으로 약 5천 원 정도다.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바삭한 츄러스도 제법 맛있었지만, 진하고 달달한 쵸코라떼는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께스로 시켜놓고 밤새도록 부어라 마셔라 하고 싶었지만, 주변에 보는 눈이 많았기에 본능을 억누른 채, 기품 있는 척 츄러스와 쵸코라떼를 조용히 즐겼다.


츄러스를 5개쯤 먹었을 때, 슬슬 배가 불러온다. 고개를 돌려가며 주변 사람들을 살펴보는데, 뭔가 이상하다. 얼핏 봐도 내 것의 다섯배는 되어 보이는 츄러스를 다들 물고 있다. 아뿔싸, 마드리드에 도착하기 전부터 '산 기네스'를 꼭 가봐야지 하고 다짐했던 것은 우연히 페이스북에서 본 대왕 츄러스 사진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이 곳에 와서는 '대왕 츄러스'를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었다.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일단 츄러스 1인분을 거의 다 먹은 상황이라, 배는 이미 충분히 부르다. 특히, 츄러스 특유의 기름기 때문에 속이 니글니글해졌기에, 더 이상 츄러스를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사실, 대왕 츄러스라고 해봐야 크기만 다를 뿐 맛은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 곳까지 와서 대왕 츄러스를 포기하고 그냥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이대로 물러선다면 분명히 일본으로 돌아간 후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란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국 카운터로 가서 대왕 츄러스와 쵸코라뗴를 추가로 주문했다. 불과 10여분 전, 유창한 스페인어로 츄러스를 주문했던 동양 남자를 알아본 것인지, 카운터 아줌마의 표정에 놀라움이 묻어 있었다. '츄러스를 하나 더 먹는다고? 엄청 느끼할 텐데...'라는 말풍선이 아줌마의 왼쪽 머리 위에 떠 있는 듯하다.


자리로 돌아가서 소화를 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몇 번 하고 나니, 종업원이 대왕 츄러스를 가져다줬다. 2개였나 3개였나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 크기가 엄청났다. 이미 배가 부른 상태였기에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봤지만, 사진 상으로는 '대왕'의 느낌이 잘 표현되지 않았다.

한참 동안 사진을 찍다 드디어 건진 샷, 아까 위에서 봤던 쵸코라떼와 같은 것인데, 대왕 츄러스 옆에 있으니, 커피잔이 마치 에스프레소 잔처럼 느껴진다. 맛은... 대왕 츄러스보다 일반 츄러스가 더 괜찮았던 것 같다. 기름에 튀겨진 면적이 많아서 그런지 작은 사이즈가 더 바삭하다고나 할까? 물론, 대왕 츄러스를 먹었을 때는 이미 배가 불러서 그렇게 느낀 건지도 모르겠다. 일행이 있다면, 일반 츄러스와 대왕 츄러스를 하나씩 주문해서 사이좋게 나눠먹을 것을 추천한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저 때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간식거리만 잔뜩 집어먹은 하루였다. 그야말로 발길 가는 대로 다니며, 그때 그때 먹고 싶으면 먹고, 쉬고 싶으면 쉬는 배낭여행의 자유를 가장 많이 느꼈던 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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