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는 곧 플랫폼에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나는 선반 위에 올려두었던 짐을 꺼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때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긴 생머리에 짙은 눈썹, 입술엔 분홍색 립스틱.
여자와 시선이 마주친 것은 분명 의도하지 않은 일이었는데 여자 쪽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가방을 둘러메고서 기차에서 내려 버스를 타기 위해 정거장으로 걸어가는데 여자의 목소리가 나를 붙잡았다. 나는 단번에 그 목소리가 기차의 그 여자일 것이라 직감했다.
여자는 검은색 반듯한 치마의 정장 차림이었다. 이 여자는 기차에서 내려 여기까지 나를 따라온 것일까?
두 번째로 여자와 나의 눈이 서로 얽혔다.
그러자 여자는 내게 한 번만 안아 줄 수 있겠냐고, 아주 정중하게 부탁했다. 머리를 숙이며, 너무나도 예의를 갖춘 정중한 부탁이었다. 이런 식의 부탁을 거절했다간 영문도 모르는 주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을 만한 모양새였다. 아니, 영문도 모르는 주변 사람들의 손가락질은 내게 아무런 해가 안된다 하더라도 나 자신이 어느 날 밤엔가 '이 예의를 갖춘 정중한 부탁'을 거절한 것에 대해 엄청난 회의감에 잠 못 이룰 날이 올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처음 보는 모르는 여자를 아무리 예의를 갖춘 정중한 부탁이라 해도 덥석 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조금 난색을 표하자, 여자는 '그냥 옛날에 유행하는 프리허그라고 생각해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말하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더 이상 물러 날 곳이 없었다.
나는 4월의 한낮에 기차역 앞 버스정거장에서 모르는 여자를 안았다.
가벼운 포옹 정도를 생각했었는데 여자는 나에게 아주 폭 안겼다. 두 손으로 내 허리를 감싸고 얼굴은 가슴에 묻었다.
여자를 안는 순간, 혹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언젠가 우리가 만났던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지 않고서야 처음 보는 여자가, 마찬가지로 나를 처음 봤을 여자가 이렇게 사무칠 리가 없었다.
여자가 안기는 것엔 그런 모든 것들이 응축되어 있었고, 나를 그 감정에 동화시킬 만큼 강력했다.
여자는 한참을 안겨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하나 둘 정거장을 떠나고서야 여자는 천천히 몸을 뗐다.
다음 날이 주말이라 다행히 아침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었다. 전날 밤은 즐거웠다. 우리는 따듯한 사케와 함께 참치를 먹었다.
여자는 미야기현에서 살고, 그곳에서 근무하는 직장인이었고 나는 미야기현엔 가 본 적이 없었다.
호텔 방의 두꺼운 커튼을 여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로 일어나 활짝 열어젖혔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이렇게나 높은데?"
호텔 방은 16층이었다. 나는 '그래도'라고 말했지만 여자는
"16층이나 되는 높이에서 나를 본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본 사람이 운이 좋은 거라고 해두자."라고 답했다.
여자는 다시 침대로 돌아와 내게 안겼다. 햇살은 차마 여자의 등을 타고 넘어올 수 없던 듯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괜찮다면."
"냄새야."
여자가 답했다. "냄새?" 나는 되물었다.
"미안."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여자가 말했기에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누워서 고개를 젓기란 쉽지 않았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내가 그걸 다 이해할 수도 없고, 나에게 이해시킬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야. 난 정말 괜찮아."
내 대답에 여자는 조금 놀란 얼굴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몸을 돌려 내게 등을 맡겼다. 나는 여자의 가는 목선 위에 얼굴을 올려놓았다. 여자에게서 정말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4월의 햇살은 참을 수가 없거든."
"어떤 점이?"
"햇살이 너무 눈이 부셔서. 그런데 하나도 따듯하지가 않단 말이야? 그래서 햇살이 밝은 것도 전부 다 거짓말 같고, 텅 비어 있는 기분이야. 어딘가에 진짜가 있을 것 같아. 4월 햇살의 따듯함은 모두 그곳에 숨겨 있는 거지. 그게 나를 못 견디게 만들어."
"넌 그걸 찾으러 다니는 거야?"
"어쩌면."
나는 뒤에서 여자를 꼭 안아주었다. 나야말로 여자가 쓸쓸해 보여 견딜 수가 없었다.
"와타나베에게서 잊고 있던 냄새가 났어. 그래서 쫓아갔던 거야."
"전 남자 친구라던지?"
"전 남자 친구라던지. 아니면 더 오래던지."
평소에 나는 향수를 쓰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우연찮게도 오랜만에 창고정리를 하며 예전 거래처 남직원에게 선물 받았던 향수 한 병을 찾게 되어 겸사겸사 뿌렸던 것이다.
그때 내게 향수를 선물해주었던 거래처 남직원은 하얀 얼굴에 손이 무척 컸던 걸로 기억난다.
"그래서 다시 한번 안기고 싶었어. 미안."
여자는 다시 사과했다. 하지만 나는 정말 괜찮았다. 누구나 그럴 때가 있다. 사랑이라는 게 그렇다. 너무 그리워하고 사무치다 보면 미친 짓도 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다.
오히려 나는 아쉬웠다. 내가 여자의 그리워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래서 우연히 다시 재회하여 그립고 아팠던 만큼 사랑을 줄 수 있었다면 하는 생각이었다.
감정은 비슷한 골에서 피어난다. 나는 여자의 정중한 부탁을 받을 때부터 어쩌면 사랑이 시작된 걸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그럴 때가 있다. 사랑이라는 게 참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