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물류센터 일을 하러 나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박카스 한 병을 샀다. 이게 뭔 대단한 효과가 있겠냐만은 심리적인 위안이라도 얻을까 싶어 게임 속 캐릭터 마냥 물약을 빠는 것이다.
카운터에서 결제를 하려는데 장난감이 들어 있는 사탕 봉지가 눈에 띈다. 포장지에 그려진 캐릭터가 제법 귀엽게 생겼길래 하나 집어 같이 결제했다.
박카스를 들이키며 봉지를 까 봤더니 조악한 오뚝이에 비닐로 캐릭터 얼굴이 씌워져 있다. 뭣도 모르고 비닐을 까는 순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땅콩모양 쓰레기가 되고 말 거다.
사탕은 예전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던 비비탄 총알처럼 생겼다. 맛있게 생기지도 않았고, 몸에도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어릴 적 못 이룬 꿈을 실현시키는 어른 마냥 사탕은 버리고 장난감만 챙겼다. 그 덕에 내 책상엔 알 수 없는 장난감과 피규어가 온통 자리를 차지하는 중이다. 딱히 고집하는 캐릭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모으는 종류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때그때 눈에 띄는 녀석들을 집어 온 거라 아마 자기들도 서로 영문을 모른 채 밤이 되면 '넌 왜 여깄냐?'라고 수군 거릴지도 모른다. 모으는 것에 큰 의미는 없다. 모은다는 것보다 그저 그 순간 갖고 싶어서 샀을 뿐이다.
물류 센터 일은 가끔 하는 일로 저번 달부터 포지션이 5층으로 바뀌면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바뀌게 되었다.
3층에서 일할 땐 신입들의 각개전투 느낌이라 가끔 눈이 마주치면 무언의 동료애가 느껴지곤 해서 좋았는데, 5층은 고인물의 놀이터 느낌이라 시선이 감옥이다. 조선시대 오가작통 마냥 서로서로 감시하는 느낌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텃세를 실감할 수 있게 하는 여사님이 한 분 계셨다. 세상을 웬만하면 아름답게 보려는 주의라 처음엔 신경을 써주는 건가 싶었는데, 가만 보니 말투와 표정에서 그게 신경이 아니라 신경질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내가 무언가 하고 있으면 꼭 일부러 옆을 지나가며 "왜 그렇게 할까~"한다. 그렇다고 왜 그렇게 할까의 반대가 무언지 알려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뭔가 잘못되었다고만 말할 뿐이다. 그게 여러 번이니, 그 잘못도 진짜 잘못인지, 그저 여사님의 기준에 성이 안차서 잘못인지도 모르게 되었다. 무언가 물어보면 나와 시선을 맞추는 건 상대의 눈이 아니라 턱이다. 어찌나 턱이 치켜 올라가 있던지.
나의 호의와 호감은 그걸 받을 만한 사람에게만 국한되어 있기에 더 이상 여사님에겐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다. 나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텃세를 부리든, 앞에서 살사댄스를 추든.
그렇다면 텃세를 부리는 여사님에겐 그런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단기 아르바이트생에게 조금 더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알량한 텃세를 부리면 마음의 우월감이라도 채워지는 것일까?
아니다, 더는 궁금해하지도 않을 거다.
새벽에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요새 푹 빠져 있는 노래를 반복 재생해 듣는다.
일을 하는 것이 꼭 돈을 벌기 위한 의미는 아니다. 언제였던 가는 돈이 의미였던 때도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지금 일을 하는 행위는 돈의 의미보다 밖으로 나오고 움직이는 것에 대한 의미가 크다. 돈을 벌고자 했다면 다른 일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러한 것들보다 이 노래에 집중하는 것이 나에겐 더 의미 있는 일이다.
하루는 이렇게 의미를 지닌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저문다. 그런 하루들이 모여 삶을 쌓아가고 나를 나타낸다. 나의 절반은 의미가 있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다. 어쩌면 내가 사랑을 하려는 이유는 비어있는 나의 절반을 의미로 마저 채우고 싶어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는 것은 내 절반을 가져가고, 내 반쪽이 되어 내 삶의 의미가 되는 것이라고. 차가운 버스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서 하염없이 이런 생각만 늘어놓는다.
의미를 지니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일까?
모르겠다.
이것이 의미 있는 질문인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질문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