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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
Apr 19. 2023
우산을 정리하는 남자
떨어지는 빗방울에서도 꽃내음이 날 것 같은 가냘픈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모든게 옅은 봄날이었다.
새로 피어나는 초록의 색도, 야물게 여문 봉오리의 분홍색도,
모두가 한번 달콤한 꿈에 빠졌다가 깬 것처럼 뚜렷하지 않은 몽환의 색을 띠고 있었다.
나는 담뱃갑을 손에 들고 도서관 로비에 마련된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어쩌면 이틀 밤을 새우다시피 머물렀던 탓에 눈이 침침해서
모든 세상이 꿈속 같아 보일런지도 모른다.
비에 젖으며 담배 한대를 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도통 일어나고 싶지 않아 몇십분을 자리에 앉은 채로 생각을 허공에 흘려보내는 중이었다.
그때 입구 쪽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입구 쪽에 바짝 다가와서 우산을 접고 있었다.
나는 오른손 엄지와 중지로 담뱃갑을 잡고 한 바퀴 뱅 돌렸다가
왼손바닥을 이용해서 다시 위 쪽으로 올려보내며, 남자를 지켜보았다.
남자는 봄비를 탈탈 털어내더니 접힌 결을 따라 우산을 가지런히 펴고 있었다.
손이 젖을 텐데,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고로 우산은 비에 젖지 않기 위해 쓰는 도구이며, '젖지 않기 위해'에는 손도 포함인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천을 정리했다. 하얗고 예쁜 손이었다.
비에 젖은 우산도 곱게 접어 정리할 만한 손이었다.
굴곡 없이 쭉 뻗은 하얀 손가락이,
섬세한 악기를 연주하듯 결을 따라 천을 접고 당기며 제자리를 찾아갔다.
나는 그 모습을 넋놓고 보게 되었다.
우산은 누구도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누구라도 언제든 사용하길 기다려 왔던 것처럼,
새봄을 맞는 꽃봉오리의 잎처럼, 그렇게 여물어져 매듭지어졌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과 사랑을 해보고 싶다고.
이야기를 나누고, 눈을 마주치며, 손을 맞 잡고 싶다고.
우산을 정리하는 다정하고 섬세한 손길로 사랑을 받아보고 싶다고.
어느새 담배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홀린 듯 일어나 한걸음 내 딛었다.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신록이 피어나는 순간에,
우산을 정리하는 느닷없는 손길에.
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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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브러진 상실 속에도 우리의 삶은 사랑으로 점철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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