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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사빛 Dec 08. 2020

나의 토피넛라떼

사는 게 뭘까요

요즘 내 상태를 한 단어로 나타내면, burnout일 것이다.

올 한 해는 누구보다 열심히, 누구보다 바쁘게, 누구보다 나를 태워낸 해였다.

아이가 어릴 때도 느껴보지 못한 극한 육아를 체험했고- 진행 중이고

그래서 프리처럼 하던 내 일도 하나도 하지 못한- 강제 경력단절 중이며

감옥이 아니지만 감옥 같은 집에서 일 년째 갇혀 있으려니 마음이 온통 곪아 터졌다.

특히 요즘은 함부로 아프면 안 되는 시기임에도 몸살이 와서 병원을 가기에도 눈치가 보이고, 그렇다고 코로나 검사를 받는 것도 이상한... 그런 상태다.

요즘은 번아웃 그 자체의 삶을 살고 있다.


오늘 아침은 또 왜 이렇게 추운가.

일이 있어 잠깐 나갔다가 너무 추워서 카페를 들렀다.
난 단 걸 잘 안 마시는 데 겨울에는 유일하게 토피넛 라떼를 좋아한다.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라 엄청. 프리퀀시를 빨간색으로만 17장을 모을 정도로 말이다.

아, 물론 정량 레시피대로 마시면 안 된다. 그렇게 마셔댔다간 아마 당뇨와 급성 고혈압이 올 거다. 시럽을 반 정도는 빼야 한다. 하지만 휘핑크림은 가득.
여하튼 한 모금 마셨는데 진짜 머릿속에 종이 울렸다. 너무 달콤하고 몸이 사르르 녹는 기분을 정말 오래간만에 느껴본 것 같다.


코로나 때문에 늘 집에만 있는 집순이라 오랜만에 밖을 나갔더니 겨울이 제대로 와 있었다.

공기에서 겨울의 향이 느껴졌다. 그런 거 있지 않은가. 계절이 가진 각각의 향들.

시리고, 약간 비릿하고, 차가운데 온기가 살짝 느껴지는 겨울의 향.

감옥에서 금방 나온 사람처럼 바깥이 그냥 어색하고 신기했다. 그래서 주변을 두리번두리번거리며 걸었다. 연말이지만 연말 같은 느낌이 없는 거리, 얼굴에 새긴 문신처럼 마스크를 이젠 안 끼면 서로 어색한 얼굴들.
카페의 테이블도, 의자도 다 치워져 있었다. 이젠 이런 모습이 익숙하다. 체온 체크를 하고 주문을 한 후 카페에 한.. 5분 있었나? 그 짧은 찰나인데도 힐링이 되었다.

카페를 가득 채운 커피 향, 달콤한 휘핑크림과 잔잔한 재즈 선율, 크리스마스 장식이 가득한 따뜻한 분위기...

나는 멈춰있었던 것 같은데 연말은, 겨울은 이미 그렇게 훌쩍 와 있었다.
이런 게 행복이지.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커피 한잔에도 감동할 수 있어서 나는 행복한 사람이야.




사는 게 뭐 특별한가 싶다. 이게 사는 거지 뭐.
가끔 난 사는 게 참 어렵다고 생각했다. 나 빼고 모든 사람들은 다 행복해 보이고 막.

특히 올 한 해가 그랬다. 나 빼고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다 행복해 보였다. 난 다 타고 없어진 느낌으로 이미 한참을 살고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은 뭐가 그리 행복해서 저렇게 웃고 있는 걸까.
근데 또 살다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세상 우울한 마음으로 카페에 들어서서는 커피 한 모금에 행복을 느낀, 얇디얇은 감정을 가진 나처럼.

결국 사는 건 다 똑같고 고민도 비슷한 것 같다.

얼마 전 읽은 허지웅 님의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삶은 남들만큼 비범하고, 남들의 삶은 우리만큼 초라하다고.
결국 다 똑같다는 거다.
그 당시에 정말 죽을 것 같이 힘들고 고민되던 것도 시간이 지나 멀찍이 떨어져서 뒤돌아보면 별 거 아니었다, 결국엔.
난 그랬던 것 같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내 기억 속 2020년도 에이, 별 거 아니었어, 결국엔. 이 되기를.

결국 내가 바라는 행복은 어떤 거창한 위로가 아니라, 작고 소소하지만 행복한 어떤 짧은 찰나일지도 모르겠다.

내 시간을 열심히 걷다 그 속에서 만나는 소소한 기쁨이 결국 행복이고, 그 작은 감정이 내 하루를 긍정적으로 바꿔주었다.

커피를 들고 나오면서 아침에 카페를 참 잘 들렀다, 생각했다.

이 작은 찰나가 새삼 기쁘고 행복할 줄이야. 커피는 식었지만 마음은 하루 종일 따뜻하다.


오늘 아침의 토피넛 라떼 한 잔을, 우울하거나 마음이 추울 때마다 꺼내어 마셔야겠다. 마음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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