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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사빛 Nov 30. 2020

뻔한 말

진부한 말, 그러나

지난주에 산부인과 검진을 갔다가 자궁 내막에 혹을 두 개 발견하여 급하게 수술을 받았다.

여성들에게 자궁의 혹이란 흔한 증상이지만 수술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던 데다가, 막상 수술대에 올라야 할 생각을 하니 두려움과 당황스러움이 물 밀듯 밀려왔다.  

담당의는 간단한 수술이라고 하였지만, 그럼에도 전신마취를 해야 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양 팔을 꽁꽁 묶었다.

공교롭게도 바로 옆 방이 분만실이었다. 분만실 산모가 고통스러운 듯 울부짖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으니 내 공포감은 배가 되었다. 나는 차갑디 차가운 수술실에 누워 그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두려움에 떨었다.


수술은 30분 만에 끝났고, 나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의사는 주말 동안에는 무조건 쉬라고 했다. 운동도 하지 말고 하다못해 가벼운 산책도 금지시켰다. 복통과 출혈이 있을 것이므로 최대한 몸을 따뜻하게 하고 약을 먹으며 푹 자라고 했다. 나의 남편은 우리나라에서 자상한 남편으로 치면 세 손가락 안에 들 것이라고 자부한다. 남편은 마치 내가 아이를 낳았을 때처럼, 화장실을 갈 때도 나를 부축해주면서 (사실은 안 그래도 되는데) 무조건 쉬라고 했다. 식사도 방으로 가져다주었다. 남편에게 참 고마웠다.


나는 방 안 침대에 누워있고, 거실에서는 아이와 남편이 전쟁터인지 집인지 모를 풍경을 만들면서 처절하게(?) 놀고 있었다. 마치 내일이면 세상에 종말이라도 오는 것처럼, 오늘만 사는 것처럼 치열하고 신나게 놀고 있었다. 전쟁터는 역사 속에서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내 몸은 침대 안에 있지만, 귀와 모든 감각은 거실에 가 있었다. 남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래서 나는 쉬는 게 쉬는 것이 아니었다.


아, 저거 저러다 망가지겠는데.

아, 아이에게 티브이를 너무 많이 보여주는 거 아닌가?

아, 카펫 위에서 왜 과자를 먹는 거지? 저거 빨려면 건조하는데 오래 걸리는데.

아, 애 점심을 그렇게 인스턴트를 주면 어쩌자는 거야.


아.........




올해 나는 아주 간절한 소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딱 하루만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것.

아무도 없는 집에서, 종일 티브이 보다가 드러누워있다가 그러다 졸리면 또 자다가 배가 고프면 일어나 밥을 먹고 또 누워있다가........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딱 하루만 쉬고 싶었다. 너무 지쳤고 너무 피곤했다.

그런데 그 소원을 이번에 엉겁결에 이루게 된 것이다. 물론 집에 남편과 아이는 있었고 내 육체는 쉬었으나 정신은 못 쉬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 소원을 절반 정도는 이룬 셈이니 이런 식으로 소원을 이룰 줄이야 하면서 웃기기도 하고 슬펐다. 몸이 아파야 쉴 수 있다는 것이. 이제 건강을 챙겨야 할 시기라는 것이. 코로나 속 남편과 아이의 건강과 안녕이 늘 우선이었던 탓인지 정작 내가 나를 안 챙겨서 이렇게 된 건가 싶은 것이.

그래서 기분이 파도를 탔다. 좋았다가 짜증이 났다가 우울했다가 또 괜찮아졌다가.


나는 친정이 멀고, 친구들 역시 타지에 있다. 그래서 수술 후 내 소식을 알렸다. 수술을 했고, 잘 끝났고, 지금은 회복 중이라는 것을. ㅋㅋ, ㅎㅎ 같은 단어를 써 가면서 최대한 명랑하게 알렸다. 특히 가족에게 알릴 때는 더더욱.


엄마는 쏜살같이 전화를 걸어 잔소리를 쏟아냈다.

평소에 몸 관리를 잘하지 그랬냐부터 시작해서, 맨날 대충 끼니를 때우더라를 지나, 미역국을 푹 끓여 많이 먹으라는 당부까지.

엄마, 미역국은 좀 오버 아니야? 애를 낳은 것도 아닌데.

그래도 여자 몸은 그게 아니다. 미역국을 푹 끓여 먹도록 해라.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거다. 내가 가까이 살았으면 한 솥 끓여주는 건데....

엄마가 말 끝을 흐렸다.

날이 선 잔소리였지만, 그 목소리 안에는 사랑이 가득 들어있었다. 엄마의 사랑법은 늘 이렇다.


친구들에게서도 많은 카톡이 쏟아졌다.

 

괜찮아?

힘내!

걱정돼.

회복 잘할 거야.

이제 아프지 마.

늘 건강해라.

보고싶어.

사랑해.


아주 당연하고 아주 흔한 말들인데,

오늘따라 그 뻔한 말들이 참 특별하게 느껴졌다. 흐린 하늘에 먹구름이 걷히는 기분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뻔한 말들이, 늘 듣던 그 말들이 여태 나를 지탱하게 하고 별 일없이 살게 한 건 아닌가 싶다.

참 신기한 일이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 마음이 뭉클하고, 움직이는 걸 보면 말이다.

그리고 새삼 깨달았다. 아주 당연한 말들이지만 그 말을 상대에게 하는 마음은 당연하지 않았다는 것도, 그 마음만은 흔하지는 않았다는 것도. 뻔하고 흔한 말이라는 건 사람들이 그만큼 많이 쓴다는 의미이므로, 어쩌면 가장 뻔하지도, 흔하지도 않은 말이라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늘 곁에 있는, 당연한 말들에 대한 감사가 밀려오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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