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랑
진짜 제대로 된 휴가였다. 애가 태어난 후로는 꿈도 꿀 수 없던 리얼 쉼. 남편은 시댁에 일이 있어 방학을 맞은 아이를 데리고 겸사겸사 부산으로 갔다. 나는 남편의 배려로 혼자 집에서 쉴 수 있게 되었는데, 무려 4박 5일이라는 긴 시간이었다. 5일 동안 뭘 할까 너무 설레서 잠도 설쳤다. 드디어 아이와 남편이 가고 나자, 텅 빈 집이 너무 따뜻해 보이고(?) 아이러니하게도 꽉 차 보였다. 집 안에 가득한 건 형용할 수 없는 나의 기쁨이었다.
뭘 할까.. 생각하다가, 일단은 아무것도 안 하고 24시간 누워있기로 했다. 집이 더러우면 좀 어떤가. 바닥에 물을 좀 쏟으면 어떠하며 과자 부스러기가 여기저기 떨어지면 또 어떠한가. 나는 대자로 누워 그동안 못 봤던 온갖 방송들을 다 봤다. 보다가 잠이 오면 그대로 자고, 일어나면 또 보고, 또 자고.. 풍요로운 잉여로움을 누렸다. 식사도 마찬가지였다. 남편 덕에(?) 맨날 나물 반찬을 먹었지만 이번엔 다르다. 라면도 먹고, 햄버거에 온갖 정크푸드는 다 먹은 것 같다. 역시 정크푸드는 맛있다. 물론 영양가 없는 살이 금방 찌겠지만, 그 또한 어떠랴.
따뜻한 매트를 깔아놓고 누워 예능을 보며 낄낄 거리면서 이불속에서 까먹는 귤의 맛이란.
천국이 따로 없었다.
둘째, 셋째 날도 대충 첫날과 비슷하게 보냈다. 첫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깥에 나가서 좀 걸었다는 것이다. 마트도 살짝 다녀왔다. 그냥 햇살이 쬐고 싶었다. 방송이 점점 지겨워져서 넷플릭스를 잔뜩 봤다.
넷째 날이 되자 나는 점점 어질러진 집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내일이면 남편과 아이가 올 텐데 지금 청소하기에는 뭔가 억울(?) 했다. 그래도 집이 더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덜 억울할 정도로(?) 물티슈로 탁자 먼지 정도 닦는 일을 했다. 작은 일이었지만 꽤 집이 깨끗해졌다.
계속 누워있었더니 허리가 아팠다. 나는 더 이상 눕지 않고 앉아있기로 했다. 누워있었더니 소화도 더뎠다. 이러다 소가 되어 하늘로 승천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 구경이 하고 싶었다. 나는 대충 패딩 하나 걸치고 집 근처 카페로 갔다. 이층에 올라가 차를 한잔 시키고 그냥 바깥만 하염없이 쳐다봤다. 사람들이 오고 갔다. 연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꽤 바빠 보였다. 양손에 선물인지 꾸러미를 들고 가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늘 보는 “사람”들이지만 오늘은 뭔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어색하고도 반가웠다.
겨울은 저녁이 꽤 빠르게 찾아온다. 여섯 시가 가까워 오자 무서운 속도로 바깥이 어두워졌다. 집에 온 나는 멍하니 베란다를 쳐다보다가 시계를 봤다. 오후 여섯 시 삼십 분. 겨우 초저녁 시간이었지만 내겐 한밤중처럼 길고 깊게 느껴졌다.
더 이상 티비 소리도 지겹고, 사람이 보고 싶었다. 도란도란 남편과 대화하던 순간들이 그리웠다. 원래 이 시간에는 얼른 샤워하라고 재촉하는 나와 하기 싫다고 도망 다니는 딸이 옥신각신 하는 시간인데, 싶어서 나는 픽 웃었다. 도망 다니던 딸이 보고 싶었다.
나는 혼자 조용히 저녁을 차려먹고 또 티비 앞에 앉았다. 그냥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연말이라 딱히 만날 사람도 없었다. 다들 여행을 가고 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또 외로워졌다.
오후 여덟 시가 넘자, 윗집에 사람들이 들어온 소리가 들렸다. 윗집은 다 큰 자녀 둘과 부부가 사는데, 이제 모두 퇴근한 모양이다. 저녁을 차리는지 누군가가 거실과 주방을 계속 왔다 갔다 하는 발소리가 들린다. 누군가는 씻나 보다. 물을 트는 소리가 들린다. 평소에는 잘 못 느꼈던 소리들이다. 지금은 혼자 집에 있어서 그런지 소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층간소음이 문제가 되는 요즘이지만, 오늘의 발소리는 왠지 마음이 편해지는 소리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누군가가 곁에 같이 있어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리라. 집에 나는 혼자 있었지만 혼자가 아닌 기분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들의 발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하루의 고단함과 가족들만이 서로 나누는 평안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또 피식, 하고 웃음이 났다.
내가 윗집 발소리에 마음이 편해지는 날이 오다니.
살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많이 주고, 또 많이 받기도 한 탓에 가끔은 사람 없는 조용한 곳에서 살기를 바라고 조용히 살고픈 마음이 컸던 나였다. 그렇지만 이렇게 단 며칠 만에 사람들의 소리가 그리운 것을 보면 나라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서로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하나보다.
새해가 밝았다. 올 한 해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랑하며 평온하게 살고 싶다. 사람들이 내는 각자의 소리들에 나 역시 나만의 소리를 내면서 그렇게 어우러지고 싶다. 그래서 외로운 사람들이 있으면 나도 나의 소리를 기꺼이 들려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밤 나를 위로해 준 발소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