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독 표류기

1.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이가 내 아들이라니!!

by 박평범

그날은 왠지 불길했다. 수많은 의혹의 순간들을 뒤로한 채 7세까지 버티다 검사하러 온 오늘, 대기실에 초조하게 앉아있던 내 앞에 아들이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나타났다. ‘엄마가 보고 싶어서 문제 빨리 풀었어!’라며. 하지만 나는 안다. 엄마가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시험이 끝나면 주겠다고 한 초코우유가 그리웠던 거겠지.

안내데스크 직원이 검사 결과가 나오면 불러주겠다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검사 문항수가 많지 않아서 그런지 다른 검사와는 달리 당일에 결과가 나오는 모양이다. 그리고, 잠시 뒤 내 아들은 공식적으로 ‘난독’ 판정을 받았다. 이로써 내 아들은 그 유명한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자’가 된 것이다.


<철이의 검사 결과지>


우리 집엔 쌍둥이가 산다. 남녀 쌍둥이이므로 편의상 철이(아들)와 미애(딸)라 부르도록 하겠다. (tmi: 저자는 소싯적 차세대 댄스그룹 ‘철이와 미애’ 팬이었다) 철이와 미애라는 신명 나는 가명과 달리 그들은 44개월부터 나의 눈물 콧물을 다 빼먹은 것도 모자라 돈까지 먹는 하마들이었다. 난독 판정을 받은 건 철이뿐이지만 44개월에 말이 너무 느리다는 어린이집 선생님의 말씀을 시작으로 철이와 미애 모두 만 3년간 언어치료, 놀이치료, 감각통합치료, 조음(발음) 치료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조음 치료를 마지막으로 이제 치료실을 전전하는 내 생활도 끝인가 싶었는데 또 난독이라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반쯤은 유체 이탈 상태로 40분 거리를 1시간 30분이나 걸려 귀가했다.


집에 와서 결과지를 펼쳐놓고 진료실에서 들은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더듬더듬 복기했다.

숫자를 순서대로 읽기, 시각 주의력 외에 모든 것이 정답률 0%에 가까움

숫자를 순서대로 읽을 수는 있으나 거꾸로 읽기는 못 함

- 즉, 숫자를 읽는 것이 아니라 ‘일이삼사오륙칠팔구십’ 이 순서로 외운 것임

시각 주의력은 짧은 시간 동안 본 글자를 기억하는 능력임

- 시각 주의력은 표기 능력(듣고 받아쓰기) 및 다음절어(긴 단어)읽기에 영향을 미침

- 철이는 하위 24%로 (100명중 뒤에서 24등) 경계 수준

숫자읽기와 시각 주의력 외의 항목은 거의 0점을 받음

- 특히, 빠른자동이름대기검사는 눈으로 본 정보가 뇌를 거쳐 입으로 발화될 때까지의 음운정보처리의

효율성을 반영하는데, 이 항목에선 난독증은 물론 ADHD인 경우에도 이상소견을 보이는 경우가 많음.


따라서, 철이는 난독 중재가 너무나 자명하게 필요하며 ADHD 여부도 판별해야 했다. 게다가 의사 선생님은 난독 중재는 일반 언어치료와 다르므로 정식 자격증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시며 <한국 난독증 협회>라는 곳을 알려주셨다. 대체 난독이란 무엇인가? <한국 난독증 협회>에 따르면,

난독증은 신경학적 원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특정 학습장애입니다.

난독증이 있으면 단어를 정확하고 유창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철자를 잘 못 쓰고, 문자해독을 어려워합니다. 이러한 어려움은 전형적으로 음소인식능력의 부족 때문에 생긴 것으로, 다른 인지능력의 문제나 효과적인 교육이 제공되었는지 여부와는 연관성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2차적으로 독해력의 문제와 독서 경험이 적어서 생기는 어휘력이나 배경지식 부족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 무슨 개똥같은 소리란 말인가? 학습장애라니, 신경학적 원인이라니? 여기까지 하고 나는 드라마에 나오는 결혼을 결사반대하는 시어머니처럼 머리에 하얀 띠를 두르고 끙끙대며 앓는 시늉이라도 하고 싶었다. 이제까지 쌍둥이 둘을 센터에 데리고 다니느라 차에서 아이들 기다리며 끼니를 대충 때우며 주차장과 길바닥에서 진을 뺀 세월이 있었지만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건 해준 건 언젠간 이 시간이 끝나리라는 희망이었다. 왜냐하면 철이와 미애 모두 늦게나마 말이 트였고, 언어 문제로 인해 또래 집단에 끼지 못했던 상처도 오랜 놀이치료로 치유되었으며, 조음 치료 덕분에 발음마저 정확해졌기 때문이다.


이제 끝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아주 검고 깊은 바닷속에 풍덩 던져진 기분이었다. 이름도 생소한 ‘난독’. 이 험난한 미지의 바다를 나 혼자, 아니 저 철이 녀석을 등에 업고 헤쳐 나갈 수 있을까? 뒤를 돌아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철이가 배시시 웃는다. 애미 속도 모르고 저 혼자만 발랄한 게 짐짓 얄미웠지만, 귀여우니 뭐 봐주기로 한다. 딱 오늘까지만 앓고 내일부터는 힘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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