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 없는 사회생활, 나는 지금도 신병입니다

신병3를 보면서

by 캡틴판양

어릴 적, 빨간색으로 이름을 쓰면 그 사람이 죽는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절대, 누구의 이름도 빨간색으로 쓰지 않았다.

정말 밉던 친구가 있었을 땐 조심스럽게 빨간 펜으로 그 이름을 써봤지만,
혹여나 그 친구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얼른 다시 덧칠해서 지우던 어린 날의 나였다.
그 시절엔 어른들의 말 한마디가 미신이 아니라 법 같았다.


사회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 도장 파는 아저씨가 우리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땐 지금처럼 출입키나 지문 없이도 물건 파는 사람들이 조금은 자유롭게 사무실에 찾아와 영업을 하던 때였다. 벼락 맞은 나무로 만든 인감을 쓰면 운이 트인다는 말과 함께 한자로 된 이름풀이도 해준다고 했다.

나는 점이나 사주를 잘 믿지 않는 편이었지만, 그날따라 왠지 궁금했다.
이름을 써보자, 아저씨가 말했다. 그리고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직업을 잘못 선택했네.”
“네? 그럼 무슨 직업이 어울리는데요?”
“여군이나 경찰이었으면, 높은 자리까지 갔을 텐데.”

순간 흠칫 놀랐다.
어릴 적, 서서 오줌 누는 오빠들이 부러워 남자는 참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또, 제복 입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괜히 멋있어 보여 어릴 때 막연히 군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나로선 묘하게 끌림이 닿았던 말이었다.

그게 내 인생 첫 ‘자의적 이름풀이’ 경험이었다.


두 번째는 친구들과 홍대를 놀러 갔을 때였다.
타로점이 유행이던 시절, 심심풀이로 카드를 몇 장 뽑았다.
그런데 타로 마스터가 갑자기 말했다.

“이직 운이 있네요. 아니면 부서 이동이라도.”

당시 나는 전혀 그럴 기류가 없었고, 그 말이 정말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그냥 가벼운 농담처럼 넘겼는데, 몇 주 뒤 본사에서 연락이 왔다.

새로 출범하는 프로젝트 팀에 나를 추천했다는 거였다.
이직은 아니었지만, 정말 뜻밖의 부서 이동이 찾아온 순간이었다.

운명이라는 단어를 쉽게 믿진 않지만, 가끔은 우연이 너무 절묘하게 들어맞을 때가 있다.


요즘은 ENA 드라마 <신병 3>을 즐겨보고 있다.
시즌 1부터 애정하며 봐온 프로그램이라 이번 시즌도 본방을 사수 중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벌어지는 예측 불가한 상황들.
진짜 같은 캐릭터들과 현실감 넘치는 군생활 묘사가 너무 재미있다.

<신병 3>을 보면서 웃다가도 문득 생각했다.
“내가 사는 이곳도, 매일이 신병 훈련소 같은 건 아닐까?”
물론, 진짜 훈련소만큼 힘들진 않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각자의 전투가 있다는 점만큼은 닮아 있지 않을까?

나는 제복도 없고, 계급장도 없지만 매일 아침, 나름의 전투를 위해 전장 같은 일터로 향한다.


제대 없는 사회생활, 나는 지금도 신병입니다.

다만, 이제는 내 이름의 운명은 내가 운전하면서 써 내려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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