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내일 월차 좀 쓰겠습니다!

왜?

by 윤아부지

신입 사원 때의 일이다.


직장인에게는 월차라는 마법이 있다.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고 하지 않았던가. 한 달에 하나씩 주어지는 월차는 써서 없애야지 제 맛이다. 정산을 해 준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휴식이 더 중요하다.


직장생활 처음으로 월차를 쓰던 날, 팀장님께 가서 당당히 말했다.


저 내일 월차 좀 쓰겠습니다!


0.1초도 안 걸린 것 같다.


왜?


예? 그냥 좀 쉬려고요.


이렇게 바쁜데 월차 쓰겠다는 말이 나오냐 묻는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월차를 쓰지 말라고 한다.


말하고 싶었다.


저는 회사에 특별한 일이 없어서 월차를 쓰는 겁니다. 그런데 특별한 일이 없으면 월차를 쓰지 말라니요.


자리에 돌아와서 선배한테 물어봤다. 월차를 쓰는데 사유를 말씀드려야 하냐고. 그렇단다. 다음부터는 부모님 생신이라 하던가 무슨 핑계든 만들어서 가라고 한다. 일단 부서 분위기가 그렇다고 한다.




대리 때의 일이다.


일이 너무 힘들었다. 대리가 되었으니 이제 업무 상의 실수를 웃어넘길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업무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거기다가 하필이면 내 회사 생활을 통틀어서 이때가 가장 바빴다.


과중한 업무에 책임감까지 얹어졌다. 다른 선배들도 각자의 업무가 바빠서 내 업무에 조언을 해 주거나 도와주거나 할 상황이 아니었다.


매일 10시 넘어서까지 야근을 했고 한 달에 일요일 1번 정도 쉴 수 있었고 나머지는 특근의 연속이었다.


하소연할 곳도 없고 너무 힘든 나날이었다.


하루는 퇴근하고 동기들을 불러 소주를 한잔 했다. 회사 욕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시며 다짐했다.


내일은 반드시 월차다
오늘은 먹고 죽는 거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 꼰대는 월차를 싫어한다. 계획을 하고 쉬는 것도 싫어하는데, 돌차(돌발성 월차)가 허용될 리 없다. 선배들이 술 먹고 돌차를 썼다가 두고두고 욕을 먹는 것을 수 없이 봐 왔다.


그런데도, 모르겠고 그냥 질렀다. 새벽 3시쯤 됐을 거다. 10시에 마치고 마셨으니 얼마 안 논거 같은데 금방 3시였다.


저 내일 월차 좀 쓰겠습니다


저질렀다. 꼰대에게 카톡을 보내고 폰을 던져 놓고 그냥 자 버렸다.


몇 년 이상 직장 생활을 한 직장인이라면 알 것이다. 슬프게도 평소 기상 시간이 되면 자동으로 눈이 떠진다.


실수로 꼰대의 답장을 봐 버렸다.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은데, 회사에 와서 이유를 말하고 쉬러 갈 것


어이가 없었다. 힘들어서 술 먹은 것을 알면서 일단 출근해서 이유를 말하고 가서 쉬라니. 그런데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저 카톡을 보고 일어나서 주섬주섬 출근 준비를 하는 내 모습이었다. 정말로 토를 입에 머금고 출근을 했다.


회사에 가서 5분도 안될 정도로 짧은 면담을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힘들다. 하루 정도 그냥 푹 쉬고 싶다.라고 하니 월차 쓰고 가서 쉬라고 했다. 이럴 거면 왜 부른 걸까. 그냥 돌차가 싫었던 거겠지.


기숙사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여전히 속은 쓰렸고 금방이라도 토가 나올 것 같았다. 눈에는 어느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펑펑 울기 시작했다. 기숙사에 도착해서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월차 하나 그게 뭐 대수라고.




꼰대가 내일 월차라고 한다. 그 월차 싫어하는 사람이 월차를 쓴다고 한다.


내일은 무두절이다!


무두절이란?

회사에서 직장 상사(頭)가 없는 날. 직장 임원과 팀장들이 휴가나 출장 갔을 때, 부하직원들이 자유롭게 업무를 볼 수 있는 날을 말하며, 부하직원들의 어린이날이라 불리고 있다.


퇴근길에 젊은 사람들끼리 삼삼 오오 모였다. 내일은 무두절이니 오늘 좀 마셔도 내일 버틸 수 있다는 것이다.


새벽까지 부어라 마셔라 였다. 다들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마셨다. 실제로 내일 꼰대가 없다!


7시 58분에 겨우 맞춰서 출근을 했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있는데 멀리서 들려오는 한마디.


오늘 좀 늦었네?


응? 꼰대는 월차랬는데?


월차 아니셨냐고 물었더니, 월차 써도 할 일이 없어서 그냥 출근했다고 한다. 예? 일이 있어서 월차 쓰신 것 아니에요? 실적 때문에 월차는 썼는데 그냥 출근했다고 한다.


아, 오늘 정말 힘든 하루가 되겠구나.




이후로 나는 월차를 쓸 일이 생기면 1주일 전부터 꼰대에게 정확한 사유와 함께 이를 알린다. 그래도 당일이 되면 왜 이 바쁜 시기에 월차를 쓰냐고 묻곤 한다.


2-3일 여행이라도 갈 일이 생기면 1달 전에는 미리 언질을 줘야지 그나마 욕을 덜 먹는다.


직장인의 필살 카드 월차. 꼭 이렇게 써야만 하는 것일까. 대체 꼰대들은 월차를 왜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것일까.


꼭 그렇게까지 해야 속이 후련했느아아아아!! 이!!




꼰대들은 궁금하다.

이 친구가 무슨 일이 있어서 월차를 쓰는 것일까?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있을까?

도대체 정산해주는 월차를 왜 써서 없애는 것일까?


꼰대들은 불편하다.

이렇게 바쁜데 월차를 쓴다는 말이 나올까?

이 친구는 회사에 관심이 없는가?

어디 면접이라도 보러 가는 것 아니야?


지금은 MZ세대들의 반란으로 분위기가 많이 좋아졌다. 하루 전에 말해도 되고 당일 아침에 말 해도 무리가 없다. 물론 직책자들이 젊어진 탓도 있겠지만 말이다.


월차를 올리는 근태계 신청서에 ‘사유’를 적는란도 사라진 지 오래다.


한 번씩 출근이 정말 하기 싫어지는 날이면 전날 밤에 팀장에게 문자로 월차 통보를 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대리 때의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떠 오른다. 혹시 또 나와서 사유를 설명하라고 하지는 않을까?


물론 더 이상 그럴 일은 없지만 말이다.


한편으로는 씁쓸했던 기억이지만,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일화를 곱씹으며, 씁쓸한 입 웃음과 함께 팀장에게 문자를 보낸다.


저 내일 월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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